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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다! 슈퍼 히어로들

위급할 때 짜잔~하고 등장한 우리의 구세주들

by 한고운

따박따박 월급이 제 때 통장에 들어오는 건 기본이요 주말은 물론이고 공휴일과 연차까지, 남들 쉴 때 같이 놀 수 있는 그야말로 팔자 좋은 직장인의 삶을 살았다. 결국은 일에도 사람에게도 이리저리 치이며 스트레스를 호소하다가, 이 삶이 지긋지긋하다며 자발적으로 뛰쳐나왔지만. 막상 자영업자로 살아보니 그때 그 시절이 눈물 나게 그립다. 다 때려치우고 강릉으로 가자며 큰소리치고 일은 저질러놓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이 모습이란! 심히 얄팍하고도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나라는 존재여.


우리 네 식구가 숨만 쉬고 살아도 최소한의 기본 생활비가 필요하다. 아무리 사교육비가 제로에 가깝고, 옷이나 신발도 중저가 혹은 중고 거래로 마련하고, 외식보다 집밥을 고집하며 발버둥을 쳐봐도 전기세, 가스비, 통신비와 같은 고정 지출은 막을 길이 없다. 여기에 보험료, 주유비, 경조사비, 장 보는 비용까지 합치면... 아니 대체 다른 집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 거지? 저축이라는 걸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한 걸까?


직장인처럼 매월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안정된 수입은 기대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통장에 어느 정도 여윳돈은 항상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고달팠다. 통장 잔고의 앞자릿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락세였다. 당연히 심장은 쪼그라들었다. 이러다 파산하는 건 아니겠지, 긴급 대출을 받아야 하나, 투잡을 뛰어야 하나,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사업 방향을 틀어야 하나 등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물론 "우리 다시 서울로 돌아갈까?"라는 말로 남편을 대 혼란에 빠뜨리는 말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뉴스에서 연신 떠들어대는 소식을 보면 상황이 심각하긴 했다. 국세청 국세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100만 명이 넘는 사업자가 폐업 신고를 했고, 폐업률은 2년째 상승세라고 한다. 하긴, 우리 카페 주변만 보더라도 임대 매물이 한둘이 아니고, 카페는 무려 4곳이 줄줄이 폐업을 했다. 남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쓰였다. 에너지와 비용을 들여 야심 차게 시작한 사업이 무너졌으니 당사자들의 실질적인 손실과 허무한 심정은 오죽할까.


돌아보면 우리 부부가 아무 연고 없는 강릉에 와서 정착하고 카페를 운영하며 아직까지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슈퍼 히어로'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진작에 대 실패를 경험했을게 뻔하다. 이들의 숭고한 헌신과 조건 없는 사랑을 누린 자로써, 잠시나마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첫 번째 슈퍼 히어로, 우리 부모님

우리 때문에 덩달아 강제 1년 강릉살기를 선택하실 수밖에 없었다. 카페를 창업해 보겠다며 준비를 시작할 때쯤, 마침 친정 아빠의 퇴직 시기가 맞아 어쩌다 부모님께서 서울 생활을 잠시 접고 1년 동안 강릉으로 내려와 주셨다. 우리에게 폐 끼치기 싫다며 자비로 오피스텔을 계약하시고, 우리 집으로 출퇴근하시면서 아이들을 돌봐주시고, 두 집 살림을 기꺼이 감당하셨다. 이 정도면 예수님 뺨치는 희생정신 아닐까?

역시나 이번에도 일을 저질러 놓는 것은 우리 부부의 몫이고, 뒷수습은 부모님 담당이었다. 항상 감사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부모님의 수고 덕분에 우리 부부는 마음 편히 카페 준비 및 운영에 몰두할 수 있었고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비빌언덕이 생긴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마음에 여유로웠던 것은 물론, 고퀼리티의 엄마표 집밥도 마음껏 누렸으며, 아이들의 돌봄도 안정적으로 책임져주셨다.


사춘기를 통과하는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고, 까칠한 딸인 나와 기분파 사위의 눈치 보랴 남편 눈치 보랴 중간에 껴서 고생하신 친정 엄마는 그야말로 고행길과 같으셨을 테지. 서울에 비해 인프라가 부족하니 적적하고, 딱히 만날 지인들도 없어 더더욱 심심하셨을 강릉라이프. 사업에 매진하느라 정신없이 달려온 우리 부부는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손에 꼽을 정도이다. 생각할수록 죄송한 마음이 가득하다.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초반에 망했을 확률 99%. 평생을 두고두고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지. 나중에 몇 배로 갚겠다고 큰소리쳐도 늘 한결같은 부모님의 반응,


"됐고, 늬들이나 싸우지 말고 잘 살아!"

(하여간 테토녀 테토남 이시라니까)



두 번째 슈퍼 히어로, 교회 식구들

서울에서 강릉은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당일치기로는 조금은 무리해야 가능한 정도니까. 주중은 그렇다 치더라도 차량 이동량이 많은 주말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정도로 왕복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교회의 지인들이 방문해 줬다. 휴가나 출장으로 강릉에 온 김에 들리기도 했지만, 그저 우리 가정과 우리 매장을 방문하겠다는 순수한 단일 목적으로 온 분들이 90% 이상이라는 사실. 참으로 황송하기 짝이 없었다.


친분이 있는 가정들의 방문도 당연히 반갑지만, 평소에 사적으로 별 교류가 없던 가정들도 강릉행에 동참해 주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일종의 밈 혹은 도장 깨기 챌린지처럼, 강릉 다녀오기가 교회 공동체에서 유행처럼 퍼졌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등장인물이 누구든 간에 이들의 존재는 우리 가정에 큰 위로가 되었다. 물론 지갑을 아낌없이 열어주는 선행을 베풀어 주기도 했지만, 따스한 격려 덕분에 가장 힘든 시기에 버틸 힘이 되어주었다.


이곳까지 와주는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바리바리 선물을 챙겨 오질 않나, 밥을 사주고 가기도 하고, 자진해서 설거지나 청소를 도와주는 등 자원봉사자 뺨치는 모습이었다. 대체 우리가 뭐길래, 이토록 많은 섬김과 관심을 받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우리 부부가 평소 행실이 엄청나게 바르고 착했던 거 아닌 거 같은데, 이렇게 인복이 많은 사람들이었다니. 받은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우리도 누군가에게 베풀고 흘려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근데... 이왕이면 서프라이즈 방문보다는 사전 연락을 좀 부탁드립니다. 저 ESTJ 에요)



세 번째 슈퍼 히어로, 카페 선배 사촌 동생

나보다 5살 어리지만 어엿한 카페 사장님인 사촌 동생 홍사장의 존재는 실로 위대했다. 오픈 초기 나의 각종 질문 세례가 귀찮을 법도 한데 차근차근 친절하게 답변해 주는 그녀의 친절함이란! 사소하게는 주방용품에 대한 궁금증부터, 제빙기 및 얼음 관리에 대한 꿀팁 등을 아낌없이 대방출해줬다.

자신도 다 겪었던 일이라 그런지 셀프인테리어부터 운영전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실무를 총망라하고 있는 그녀의 조언은 뼈가 되고 살이 되었다. 바쁜 와중에 간을 쪼개서 강릉에 두 번이나 방문해줬는데, 메뉴 개발에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우리의 시그니처 음료 메뉴인, 바다의 모습을 담은 <오션 드링크>도, <두부 크림라떼>도 탄생할 수 있었다.


여전히 홍 사장은 지금도 나의 가장 큰 멘토로 활약 중이다. 아르바이트생을 선발할 때도, 세금 관련 이슈도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스승이다. 물론 인터넷 검색이나 유튜브 콘텐츠로도 부지런히 답을 찾아보지만 만족할만한 답변을 얻지 못할때면 그녀를 통해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홍사장과 그녀의 언니, 그러니까 홍 자매들은 늘 우리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매장 오픈쯤에는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네며 두둑한 금일봉을 하사해주고, 자영업자의 필수품인 멀티비타민 이뮨샷을 선물해 줘서 피곤할 때마다 요긴하게 활용했다. 개업 축하 선물에도 센스가 넘쳤는데,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는 모던한 화이트톤의 세련된 소화기 선물도, 주방 필수템인 미니 선풍기도 설거지를 빠르게 말려주는데 어찌나 효자템인지 모른다. 역시 카페 사장 짬바는 남달랐다.

지금은 판매가 중단되었지만 예전에 두부찹쌀파이를 판매했을 때 왕창 단체주문으로 매출을 톡톡히 올려주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는 보리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는 사실. 여전히 알짜배기 정보 제공자이자, 파이팅을 외쳐주는 동반자이자, 카페업계의 대 선배로 우리 부부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이다.


(근데... 카페 운영이 이렇게 빡쎈줄 알고 있었으면 나 좀 진작에 말려주지 그랬어!!!)




이 외에도 수많은 인친, 스친들이 우리를 먹여 살려주셨다. 온라인상에서 친분을 쌓고, 친구가 되는 과정이 참 신기했다. 우리가 sns에 끄적이는 일상을 공유하며 마치 자기 일처럼 함께 웃고 울고 해주는 것 물론, 매장에 귀한 걸음을 해주시고 왕창 돈쭐을 내주셨다.


카페의 특성상 성수기 비수기가 나뉘기도 하지만, 특히 우리 매장의 방문객은 관광객이 90% 이상이다 보니 시즌별로 매출의 차이가 극명하다. 이럴 때마다 적절하게 지인들의 행렬로 채워지고 덕분에 하루하루 버틸 수 있었다.


우리의 제품과 브랜드가 노출된 방송을 보고 상기된 얼굴로 찾아와 주시는 손님들도, 궂은 날씨에 택시를 타고, 심지어 캐리어 가방을 끌고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기꺼이 방문해 주시는 손님들의 발길에 늘 감사할 뿐이다.


선물용으로 필요하다며 두부티라미수 20여 개를 한꺼번에 싹 다 포장해 가신 큰 손 고객님도(지금까지도 전무 후무한 기록으로, 객단가 탑을 찍어주심), 하루 종일 유독 한산해서 긴 한숨을 지던 날 마감시간 30분 직전에 와르르 몰려와서 솔드아웃을 해주신 단체고객분들도(1인 1티라미수를 주문해 주시는 쾌거를! 분명 배운 분들임에 틀림없음)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인상 깊었던 순간들이다.


명절 연휴, 여름휴가시즌 등 가장 바쁜 시기마다 먼 길을 마다하고 강릉에 내려와 주는 우리 언니 가정도 너무 고맙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이 함께 어울려 즐겁게 놀기도 하고, 요리사 못지 않은 실력의 언니표 특식은 퇴근 후 쌓여있는 피로와 긴장감을 눈 녹듯 사라지게 만들어줬다. 이렇게 우리 한자매의 추억은 쌓여가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고마운 분들이 생각할수록 정말 많다. 이들 덕분에 우리 가정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 혹독한 광야의 시절을 보내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사건, 그리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길을 친히 인도해 주시는 사건을 우리 삶속에서도 동일하게 체험했다. 이를 통해 신의 존재가 입체적으로 경험되었고,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수적인 효과로 서울에 살 때 보다 신앙심은 확실히 깊어진 건 틀림없다)


의지할 친인척도 없이 강릉에 정착하여 월급쟁이에서 자영업자로 살아보니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불안감과 좌절감에 휩싸여 울적한 날도 많았다. 역대급 불경기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몇 달 전 강릉 전역을 뒤흔든 가뭄 이슈와 같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다양한 이슈들을 경험하면서 때로는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과연 이 방향으로 가는 게 맞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지금도 여전히 고민되고 막막한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텨온 것은 기적과 같다.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때에 따라 적절하게 내려주시고 우리를 어떻게든 선한 길로 이끄실 거라 믿으며 주어진 하루하루를 있는 후회 없이, 힘껏 최선을 다해 잘 감당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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