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동 Nov 10. 2021

생선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지 않기를

내가 살고 싶은 집의 최소 조건

얼마 전 언론사 필기시험을 보고 왔다. 그중 기억에 남는 상식 문제가 있었다. '4인 가구의 최소 주거 기준은 몇 ㎡일까요?' 정답은 43㎡(13평)이었다. 답을 알게 된 나는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나는 선지 3번에 있던 60㎡를 선택했다) 동시에 3개의 침실로 활용 가능한 방과 부엌이 있어야 한다는 설명에 경악했다. 13평을 어떻게 네 분할로 나눈다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요즘 3~4인 가족들이 많이 사는 '국민 평형', 방 3개에 화장실 2개가 딸려 있는 주택의 면적은 보통 84㎡(34평)다. 최소 주거 기준으로 제시된 면적(13평)의 두 배가 넘는다. 이유가 있다. 해당 주거 기준은 2011년 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2011년 만들어진 이후 10년 넘게 바뀌지 않았다. 시대에 뒤떨어진 기준이었던 것이다.


요즘엔 혼자 34평 아파트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방 하나는 드레스룸, 하나는 게스트룸, 하나는 침실로 삼으면 딱 좋다고 한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최소 주거 기준도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것 같다. 동시에 나는 '면적' 못지않게 중요한 최소 주거 조건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넓은 집에 살아도, '이것'이 충족되지 못하면 불행한 삶을 살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환기가 잘 돼서 생선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지 않아야 해.' 생각보다 소박하면서도, 실현하기 어려운 조건들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최소한 고려되어야 하는 항목들을 차례대로 나열해보았다.




- 자고 일어나 눈을 떴을 때,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가는 집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반지하다. 창문이 있긴 하지만 너무 위에 위치해서 170cm 정도 되는 사람이 있는 힘껏 손을 뻗어야만 겨우 닿는다. 그마저도 크기가 굉장히 작고, '창문'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못한다. 창문을 여나 닫으나 상관없이 방은 늘 어둡다. 형광등을 끄면 한낮에도 밤 같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에 눈 비비며 잠에서 깨는 삶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빗소리로 아는 게 아니라, 집 앞을 드리운 먹구름을 통해, 번쩍이는 섬광을 통해, 창문에 맺힌 작은 빗방울을 통해 알아채고 싶다.


- 기분 내킬 때마다 창문을 열 수 있는 집

바깥 날씨가 좋아 한 줌의 바람이라도 느끼고 싶을 때 창문을 연다. 그러다 지상의 행인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죄를 진 것 같다. 시선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향하기 때문이다. (행인이 반지하에 사는 날 내려다보는 것 같다) 부끄러움에 창문을 후다닥 닫는다. 내가 원하는 때 창문을 여닫을 수 있는 것도 일종의 특권이다. 창문이 제 기능을 못하는 집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친구 집에 방문했는데, 환기를 한다던 친구는 창문을 열지 않고 에어컨을 켰다. 창문을 열어도 별 소용이 없단다. 거대한 빌라 건물이 친구 집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아파트나 오피스텔을 다닥다닥 짓다 보니 생긴 일이다. 얼마 전 길을 걷다 본 일조권 침해 규탄 현수막이 생각났다. 왜 누군가는 한강 뷰 노을을 매일 같이 보는데 누군가는 벽(壁) 뷰를 감인하며 살아야 할까? 집 바로 앞에 대로가 있어 창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창문을 열면 매연과 분진이 들어와 집 안이 검은 때로 까매진다고 한다. 나는 적어도 창문이 제 역할을 하는 집에서 살고 싶다.


- 부엌과 침실이 분리되어 있고, 환기가 잘 되는 집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했을 때, 그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집은 주방 후드가 고장 나 조기 하나를 구워도 그 냄새가 온 집에 반나절 넘게 남는다. 음식 조리 시 발생하는 연기가 폐암 발생과 연관 있을 수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다. 신문 기사 속 전문가는 자연 환기를 하고 주방 레인지 후드를 켜라고 조언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선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가이드라인이다. 반지하에 살기 때문에 바람이 드나들지 않아 통풍이 어렵다. 주방 후드는 너무 오래돼서 입주할 때부터 맛이 가 있었다. 그냥 이 집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그 전까진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는 게 최선이다.


- 청소할 맛이 나는 집

자가가 아닌 남의 집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맘에 들지 않는 체리색 몰딩도, 포인트 벽지도, 구형 수도꼭지가 달린 세면대도 그저 참고 견딘다. 왜? 어차피 n년 뒤면 떠날 곳이기 때문이다. 사서 문제를 키우는 사람이 바보라고 생각한다. 인테리어를 할 때마다 집주인 허락을 맡아야 하니 번거롭다. 그러다 보니 대충 산다. 건드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인테리어를 해보고, 어느 정도 선에서 포기한다. 모 방송인이 전세로 얻은 집은 세상 더럽게 쓰다가, 청약에 당첨돼 자가에 입주한 뒤 깔끔하게 산다는 얘길 들었다. 거슬리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짐작이 갔다.


우리 집 역시 청소로는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 일단 곰팡이. 아무리 제거해도 반지하의 특성상 계속 생긴다. 두 번째로 욕실 거울. 이사를 올 때부터 녹이 슬어 있었다. 그 정도가 심각해 과장을 조금만 보태면 갓 출토된 청동기 시대 거울 같다. 새 거울을 구입하면 해결되겠으나 거울이 있던 자리에는 이미 거대한 녹물 자국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평형이 맞지 않는 천장. 여름만 되면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 지지대가 물을 먹어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사는 데 지장은 없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큰 문제가 생길 것 같다. 나는 이런 엉망진창 집이 아닌, 약간의 청소로 유지 보수가 가능한 집에 살고 싶다.


- 베란다나 작은 텃밭이 있어 식물을 자연광 받으며 키울 수 있는 집

장롱 속에서 키워도 끄떡없다던 산세베리아가 우리 집에 온 지 6개월 만에 목숨을 잃었다. 식물들은 이상하게도 우리 집에만 오면 모조리 죽었다. 아마 햇빛 한 줄기 안 들고, 통풍조차 제대로 안 되는 극한의 생육 환경 때문일 것이다. (미안해 식물들아...) 식물이 다 죽어나가는 환경에서 사람은 건강히 살아갈 수 있을까? 올해 들어 유독 잦아진 엄마의 기침 소리, 자꾸만 빨개지는 아빠의 피부를 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가까운 미래엔 사람도 식물도 건강할 수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 LED 식물등에 의존하지 않아도, 의식적으로 햇볕을 쐬어주지 않아도 식물들이 싱그런 녹색 새잎을 틔워줬으면 좋겠고, 사람 역시 그랬으면 한다.

이전 10화 집이 물에 잠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