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언제쯤 편해지나요?"

꼭 편안함에 이르러야 하나요?

by 루안 RUAN

어느 날, 난생처음으로 점집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는 젊은 여성의 점쟁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첫마디가 이거였다. "저는 언제쯤 편해지나요?"라고 물었다. 이때 젊은 여성의 점쟁이가 눈알을 굴리면서 갑자기 나한테 팩폭을 날렸다. "아이고, 너는 너를 잘 모른다. 편해지려고 하다간 더 불편해질 거야. 아무것도 안 하면 불행하다고 느낄걸? 편해지고 싶으면 죽어서 편해라."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죽어서 편하라니, 난 지금 매일매일을 고군분투하면서 힘들어 죽겠는데 죽어서 편하라고? 매일 걱정과 고민에 시달리고 이 세상이 날 도저히 가만 안 두는 것 같아, 매일 숱한 '걱정거리'가 날 휘감아서 왔더니만 죽어서 편하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는 무작정 편안해지고 싶었다. 서너 번 넘게 보고 지금도 종종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힐링하고 있는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이라는 인물을 볼 때마다 아직도 마음이 저릿저릿하다. 마지막 화에서 아저씨는 이지안 에게 마음속으로 말한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이 대사와 표정이 내 마음을 후벼 팠었다. 투잡 쓰리잡을 뛰며 컴컴한 어둠 속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맥심커피 두 봉지를 탈탈 털어 넣으며 커피포트에 물을 한가득 끓여서 돌돌 섞은 후 한편에 쪼그려 앉아 마시고, 매일 무표정으로 할머니를 돌보는 그런 삶은 아니지만 각자의 삶 속에서 우리 모두는 '이지안'이다. 우리 모두는 크기와 상관없이 걱정거리와 불편한 마음을 하나쯤은 지니고 살고 있으며 늘 편안함에 이르고 싶어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20대 중반의 부족한 나는 무작정 프리랜서에 도전하여 세상에 내던져져서 온갖 사람들에게 치이고 또 도전하고를 반복했었다. 30대의 나는 새로운 사업, 온라인 판매와 오프라인 장사를 동시에 도전하면서 0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었고, 또 다시 배우고 또 치였다. 매 순간이 새로운 도전이었고, 치열하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도 또 도전하고를 반복하는 삶이었다. 나는 돈을 말도 안되게 많이 벌어서 '궁극적인 편안함'에 이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을 비롯하여 각자의 인물들은 결코 평탄하거나 쉬운 길을 가는 인물들이 1명도 없었다.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끌어안아 주고, 무너진 사람들은 무너진 채로 살아간다.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자신만의 평온을 찾아가는 모습들이 보인다.


결국, '아저씨'는 이지안에게 "편안함에 이르렀나?"라고 말했을 때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안, 지금 너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나?" "그럼에도, 너 자신의 일상이 극단적인 어려움 없이 편안한가?" "지안, 바쁜 일상 속에서 너만의 평온을 찾았나?"라는 뜻일 수도 있다. '편안함'이란, 단순히 외부 환경의 변화나 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제 나에게는 편안함이란 삶의 소음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덩어리들 속에서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만의 속도를 찾고, 내 마음을 토닥거려 주는 것에 가깝다.


어쩌면 점쟁이가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편해지려거든, 죽어서 편하고) 지금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진정한 평온을 맛볼 것이야!"라는 말이 내 마음에서 울려 퍼졌다. 내가 추구했던 '궁극적인 편안함'이란,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각자의 삶에서 돋보기처럼 들여다봤을 때 어느 누구도 '궁극적인 편안함'을 지닌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온이려, 위이불맹, 공이안"


지온이려(子溫而厲): 온화하면서도 엄격하다.

위이불맹(威而不猛):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다.

공이안(恭而安): 공손하면서도 편안하다.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강압적이지 않으며, 공손하지만 편안해야 한다."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서서히 스며들듯이 온몸으로 깨닫고 있는 것 같다. 편안함과 온화한 것은 단순히 쉬운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호함과 자신감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상태였다. 이 모든 것은 그라데이션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었다. 즉 삶의 긴장과 느슨함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진정한 삶의 균형(중용의 삶) 일 것이다.




서양철학에서는 대표적으로 중용을 외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말한다. "덕(virtue)은 과도함과 부족함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다" 즉 모든 덕목은 두 극단사이의 중간값에 있다는 것이다.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용이 필수라고 말했다. 내가 추구하는 삶과 매우 일맥상통한다.

나는 도시에서의 열정적인 활동도 매우 중요하지만, 자연에서의 회복과 안정도 함께 추구하고 싶다. 도시와 자연, 이 두 가지 상황을 모두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활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생활도 너무 좋아하지만, 반면에 새소리를 들으며 자연 속에서 명상을 하거나 멍 때리는 느슨한 삶도 매우 좋아한다. 과도한 경쟁이나 스트레스를 절제하고 외부적인 성취와 내면적인 성찰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룰 때, 그것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삶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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