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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Oct 24. 2021

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여정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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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적·영화는 《 》, 논문·언론·그림은 < >, 법·조례는 「 」, 굿·노래는 ‘ ’로 표기하였습니다.



신화로 살펴보는 제주 문명사





여정을 떠나며




신을 본 적이 있는가?



지구상에서 가장 단기간에 무수한 팬층을 확보한 신은 단연 토르일 것이다.


이제 제우스보다 유명해진 천둥의 신 토르는 가까운 영화관 스크린이나 모니터, 액정 너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화면 속 토르는 묠니르라는 망치를 부메랑처럼 휘두르며 괴물을 무찌르고 인류를 보호한다. 본래 북유럽 신화에서 토르는 빛과 수호, 정화, 치유, 생산성을 의미한다. 천둥은 자고로 비와 번개를 동반하는 법, 토르는 망치를 매개로 천둥을 소환하여 단단한 바위 거인과 악당을 섬멸하고, 벼락으로는 서리를 녹이거나 죽은 자를 되살려내기도 한다. 덤으로 내린 비는 척박했던 땅을 축이고 생명의 싹을 틔운다.


미국 자연자원보호청의 세계토질평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유럽에서 영구동토지대인 그린란드를 제외한 토양의 약 90%가 회복력은 높은 반면 생상성은 낮은 하위 등급 토질로 평가된다. 북유럽 신화 속 토르는 바위 거인과 얼음 거인을 부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대지의 여신과 결혼하여 수확철마다 인간 곁으로 돌아온다.


<Inherent Land Quality Map>  |  출처: nrcs.usda.gov


어쩌면 토르는 동토 산림지대에서 식량을 일궈야 했던 노르드-게르만족의 간절한 "소망"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닐까?


한국에도 비교적 최근 이름을 널리 알린 저승사자가 있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영화, 《신과 함께》의 강림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강림 도령은 제주도 무속의례 본풀이의 “강림 차사”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제주 ‘차사 본풀이’에서 인간 강림은 염라대왕을 찾아 저승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그의 눈에 들어 저승사자 직을 수행하게 된다.


영화 속 강림은 사고로 죽은 소방대원 김자홍의 영혼을 7번의 지옥 심판에서 변호하며 저승길을 인도한다. 강림이 읊어주는 우여곡절 많은 자홍의 삶은 우리네 인생살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재판이 거듭될수록 자홍은 강림을 신뢰하게 되지만 강림은 자홍의 생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문책한다. 달리 보면 강림은 자홍의 지옥행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변호하는 수호자다. 저승대왕들의 징벌에 앞서 자홍을 꾸짖고 달래 바른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홍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깨닫고 강림에게 의지하여 한을 풀고 환생에 성공한다. 차사 강림은 인간의 윤리적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매개자다. 


어쩌면 무속신앙 속 저승사자는 늦지 않게 회개한다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자애로운 관점의 "양심"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또 하나의 전설을 들여다보자. 가진 것은 없지만 바르게 자란 주인공에게 기적처럼 귀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스테디셀러다. 미녀와 야수에 버금가는 한국의 전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소개한다. 


가난하고 못생겼지만 성품이 좋고 효심이 지극했던 온달은 궁에서 내쫓긴 평강공주와 혼인하여 공주의 덕으로 입고 먹으며 문무文武를 갈고닦아 장군이 된다. 평강공주에게 초점을 맞춰 보자. 아버지 평강왕은 공주가 어릴 적 자주 눈물을 보이자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공주가 혼기가 차자 왕은 상부上部 가문에 시집을 보내려 했지만 공주가 극구 고사하자 공주를 궁에서 쫓아내기에 이른다. 공주는 패물을 잔뜩 가지고 나와 온달과 혼인했고, 물심양면으로 온달을 지원해 교화시키고 끝내 왕에게 인정받는다. 공주는 쫓겨나는 와중에도 야무지게 궁의 보물도 챙겼고, 정략결혼을 피해 결혼한 남편도 보란 듯 출세했으니 마찬가지로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설화로부터 당대 사회 풍조와 민중의식을 엿볼 수 있다. 온달과 공주는 사회적 통념에 굴하지 않고 한계를 극복한 주체적인 인물이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전설에는 당대에 만연해 있던 가부장제와 신분제를 향한 민중의 "비판 의식"과 출세를 향한 "열망"이 양가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화와 서사무가, 전설의 예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통칭 설화라고 부르는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적을 무찌르고 병든 이를 치료하는 등 기적을 경험하거나 한계를 극복하면서 원대한 포부를 실현해 나간다. 이야기의 표면 아래에는 권선징악과 회개, 과거를 답습하지 말라는 성찰 의식, 곧 선인들의 가르침과 교훈이 자리한다. 보다 심층에는 기대와 믿음, 분노, 사랑, 욕망, 용기, 환멸과 같은 당대인들의 다양한 심정이 숨겨져 있다. 덕분에 우리는 결코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과거의 문화와 풍습, 당대인들의 사조를 생생히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신화와 전설은 잊혀 갔다. 실증주의나 무속신앙 말살정책과 같은 정부 차원의 제재도 망각의 주된 요인이다. 혹자는 설화가 논리나 과학으로부터 동떨어진 상상력에 그친다며 폄훼한다. 구비문학이라는 특성상 텍스트에 비하여 이야기의 변화가 유동적이며 일관성이 낮고, 때로는 기승전결의 부재까지 목격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의 근거는 도리어 설화의 가치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설화는 잠들어 버린 역사 속에서 당대인들의 의식과 생존 양식, 문화를 채굴해낼 수 있는 광맥과 같다. 문화의 가치는 결코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다.


설화에는 역사 기록에 담을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이 무형의 유산으로 매장되어 있다.



마침 한반도에는 일만 팔천 신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제주도가 있다.


제주는 섬이라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바닷길이 열린 이래 대륙과 곳곳의 섬을 오가며 각양각색의 문화를 수용하여 몸집을 불렸다. 본토와 동떨어진 섬이지만 오히려 그 특징 덕분에 끊임없이 여러 문화권과 교류하며 다채로운 발전을 이룰 수 있던 것이다. 다양한 문화와 융합하며 발전해 온 제주 문화는 지극히 독자적이지도, 대단히 보편적이지도 않다. 그렇기에 제주를 탐색하는 것은 이 섬이 품고 있는 수많은 문화를 탐구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제주는, 현재도 채록 중인 대규모 백과사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 놀라운 섬은 한반도 남단에서 깊게 잠든 활화산을* 중심에 두고 오랜 풍파를 견뎌왔다.


풍성한 문화 집합체의 중심에는 특유의 역사가 켜켜이 쌓아 올린 고유의 정체성이 있다. 척박한 화산암 위에 땅을 고르고 물을 길어 생명을 키워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바당밭에서 나는 진귀한 해산물, 들판을 누비는 검은 소와 말, 돼지, 땅밭에서 어렵게 일군 귤이란 귤은 죄다 공물로 바쳐야 했으니 자못 잔혹하기까지 하다.


《탐라순력도》에 수록된 그림 <감귤봉진>에는 1년에 총 4만여 개의 귤이 봉진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좌-감귤봉진, 우-귤림풍악>  |  출처: 탐라순력도


피땀 흘려 수확한 공물을 바친 선인들은 제주에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며 도읍에서의 삶은 마냥 낙원일 것 같아 부러워했을 것이다. 이러한 양가적 감정이 누적되어 "제주=주변부”라는 집단의식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제주 신화에 반영된 주변부 인식은 버림을 받았거나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고 한을 풀어 신이 된다는 서사 구조로 나타난다. 만일 주인공이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갖은 수난을 거치고서야 신이 될 수 있다. 당대 제주인들의 사조와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설화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문화는 문명의 씨앗이자 모태다.


오랜 문명사로부터 문화를 따로 떼어놓을 수는 없다. 문화와 문명, 역사를 탐구하는 데에는 다양한 갈림길이 있다. 이 책에서는 생동하는 문화자원으로서 설화가 지니는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 주목하여 지역 문명사를 이해하는 도구로써 지역 설화를 활용하려 한다. 책 제목에 신화만 언급한 까닭은 순전히 신화의 섬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우리는 비록 신을 직접 볼 수도, 확인할 수도 없지만 오래된 신화 속에서 오늘날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참고문헌


<Inherent Land Quality Map>, 《NRCS》, https://nrcs.usda.gov.

<柑橘封進>, 《耽羅巡歷圖》.

Paul Ricoeur, <Science and Ideology>, 《From Text to Action》,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1.

 

사진출처 | unplash.com; 탐라순력도; NRCS(nrcs.usda.gov)


* 막간 상식 *
한라산은 불과 1,000년 전 화산 분출이 있었고, 지금도 지하 10km~55km 지점에 마그마 용융체가 존재하는 활화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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