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 신석기 혁명과 여신의 죽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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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대할망은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섬과 본토를 잇는 다리 쌓기에 열중하였다. 제주 사람들도 할망과의 약속에 부응하기 위하여 옷을 만드는 데 전념하였다. 거대한 할망의 옷을 만들려면 모시* 100필이 필요하였다. 사람들은 오름과 곶자왈을 오가며 모시풀을 꺾어 모시를 짰는데 딱 1필이 모자랐다. 제주인들은 급한 대로 옷을 지어 할망에게 바쳤다. 바다에서 다리를 놓던 할망은 옷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모든 제주인들이 축하를 위하여 모여 있었다. 할망은 기뻐하며 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돌연 할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99필의 모시로 지은 옷이 채 한 벌이 되지 못하여 할망의 고래굴 같은 음부가 슬쩍 드러난 까닭이다. 할망은 수치심과 실망감에 사람들을 피하였다. 제주와 본토를 연결하는 다리 놓기도 그날로 그만두었다. 제주 사람들은 설문대할망에게 미안해하며 화산섬의 좁은 땅덩어리와 부족한 자원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러기도 잠시, 설문대할망이 짓다 만 다리가 물에 잠겨 제주가 다시 섬이 되자 제주인들의 마음도 점차 날을 갈기 시작하였다. 미완의 옷에 크게 실망한 할망이 한숨을 쉴 때마다 폭풍이 일어 물질을 할 수 없었고 몸을 뒤척일 때마다 커다란 파도가 일어 배를 삼켰기 때문이다. 제주인들은 고립되어 버린 척박한 화산섬과 거대 여신에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다.
신석기시대에 정착 생활을 하게 된 인류가 맞이한 변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사냥감을 따라 이동 생활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던 고대인들이 정착을 하며 씨족 집단이 탄생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경 생활의 시작과 함께 예측불허 한 자연의 섭리 앞에서 신앙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농경 생활을 시작한 원시인류는 한 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정착 생활로 씨족 집단이 번성하였다. 농경 정착 생활과 함께 탄생한 원시 신앙은 집단의 결속력을 강하게 만들었고 이는 다시 집단의 생활양식 발전을 이룩하였다. 원시 신앙은 일반적으로 부족을 상징하는 동식물을 믿는 토테미즘, 자연물의 령靈을 기리는 애니미즘, 영혼이나 신을 모시며 무당이 제례 의식을 하는 샤머니즘 순으로 뒤로 갈수록 관념이 더욱 발달했다고 여긴다.
그런데 제주가 맞이한 변화는 육지부의 일반적인 흐름과 달랐다.
제주 고대인들은 농경이 아닌 어로를 위하여 정착을 시작하여 신석기 혁명을 맞이하였다. 신석기 혁명의 핵심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던 원시인들이 자연을 개발하며 통제하는 단계로 전진했다는 데에 있다. 육지부에서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지을 때 제주에서는 바다의 자연적 지형을 변형하여 물때에 맞춰 고기잡이를 하였다. 제주 바다에 물이 빠지면 갯가에 늘어선 바닷속 돌담이 보인다. 이를 원담 혹은 원, 개, 통이라 부른다. 원은 저절로 형성된 것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 인위적으로 썰물 방향을 향하여 만들어져 있다. 이는 척박한 화산토와 메마른 건천으로 대변되는 제주의 환경이 유발한 고유의 흐름이었다. 제주 신석기 혁명이 바다로부터 시작되어 해양문화로 발전되었음을 방증하는 자료를 살펴보자.
국내 최고最古의 신석기 유적은 제주 한경면 고산리에 있다. 고산리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의 연대측정 결과 국내 신석기시대 상한이 최소 8,000년 전에서 최대 12,000년 전으로 앞당겨졌다. 고산리유적은 북서쪽에 석산을 남동쪽에 오름을 두고 자구내 포구에서부터 하천변을 따라 발달되어 있다. 1998년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될 당시 면적이 98,465㎡이었지만 추가 발굴조사를 할수록 면적이 확장되고 있다. 국내에서 발굴된 전기 신석기 움집의 규모가 20㎡ 내지 30㎡임을 감안할 때 공식적으로 지정된 범위만 약 10만㎡에 달하는 고산리유적에 거주하던 신석기 집단은 매우 큰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적에서 발굴된 고산리식 토기는 식물이나 짐승의 털을 진흙과 섞어 빚은 뒤 구운 섬유질 토기로 한반도에서는 발견된 적 없는 고토기古土器다. 고산리식 토기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보다 최소 2,000여 년에서 최대 6,000여 년 앞선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고산리식 토기에 곡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 유적은 해안가나 강가에서 탄화炭火된 곡류와 함께 발견되기 마련이나 고산리유적에서는 탄화된 열매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르면 후기 구석기시대에서부터 2,000년 간 거주한 대규모 움집터에서 농경 생활을 고증하기 어렵다는 점이 방증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하나는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러시아 극동 신석기 집단이 아무르Amur강을 따라 이동하다 급격한 해수면의 상승으로 섬이 되어 버린 제주도에 정착하게 되었을 가능성이다. 고산리유적의 유물은 한반도 내륙 지방에서는 발견된 적 없으나 러시아 신석기 유적 중 아무르강 중류의 그로마투하유적과 하류의 가샤유적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에 따를 때 극동 지역에서 이주해온 신석기 집단은 뜻하지 않은 고립에 고산리 해안에서 하천을 따라 이동하며 수렵, 채집 생활을 지속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고산리유적의 유물이 강정, 김녕, 오등동에서도 확인됨에 따라 해안가와 하천 변을 따라 제주 둘레를 크게 돌며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산리 유물 중 석기류에는 고기잡이용 석촉을 단 사냥 도구와 견과류를 제분하던 갈돌 및 갈판이 다량 발굴되었다.
다른 하나는 수렵, 채집을 하며 이동하던 고산리 신석기 집단이 아무르 강을 따라 주변 지역과 교류하였을 가능성이다. 제주는 북부 및 북서부 해안가를 제외하고 모두 화산 토질이므로 애초에 양질의 곡식 종자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제주가 본토에 비하여 이른 시기부터 해상 교역을 하였다는 기록들을 감안할 때 해수면 상승 이전에는 주변 지역을 육로로 이동하던 수렵, 채집 집단이 해수면 상승으로 섬에 고립된 후에도 주변에 왕래하기 위하여 일찍이 목선 제작과 항해술에 몰두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안가에 위치한 고산리유적에서 발굴된 옥玉 귀고리는 제주에서 존재하지 않는 재료들로 만들어져 신석기시대에 제주의 해상 교역을 짐작하게 한다.
두 가지 가설의 공통점은 고대 제주에서 농경 생활이 여의치 않았다는 것과 그로 인하여 수렵, 채집 생활이 오래도록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주목해야 될 점은 고산리 집단이 2,000년간 고산리 일대에서 거주했다는 사실이다. 중기 신석기시대에는 전前 문화 경향이 일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인 상식에 따를 때 신석기 집단의 전前 문화 현상은 돌괭이, 돌낫, 돌보습, 돌삽 등의 생산 도구와 함께 농경 기술이 발전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고산리유적에서는 수렵, 채집과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었을 뿐 고대 농기구나 곡식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농경이 불가능에 가깝던 제주에서 고산리 집단이 한 지역에 2,000년 간 거주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실마리는 신석기시대에 도내 곳곳에 형성된 신석기시대 패총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다음 글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제주의 해양문화를 살펴보자.
참고문헌
李衡祥, <地理>, 《南宦博物》.
이성돈, <선사시대, 제주에서 농업이 늦게 태동한 이유는?>, 《헤드라인제주》,
www.headlinejeju.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4941.
<제주고산리유적>, 《제주 고산리 유적》, gosanriyujeok.co.kr.
사진 출처 | pixabay.com; 문화재청(heritage.go.kr)
*모시
설문대할망 설화 원본에서는 옷감 재료로 ‘명주’를 지목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모시’로 대체하였다. 명주는 뽕나무의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로 만든 동물성 견직물이며 삼국시대를 전후로 제직되기 시작하였다. 모시는 습하고 따듯한 지방에서 서식하는 쐐기풀의 줄기를 찢어 만든 식물성 직물이며 옛날에는 삼베와 구분 없이 마직물의 총칭으로 사용되었다. 모시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직물이며 한반도에서는 기원전에 이미 직조되었다. 우수한 모시 품질을 자랑하는 한산에서는 모시풀이 자라나지 않아 전라도나 제주도에서 재배된 모시풀을 배를 통해 공급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