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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Oct 24. 2021

알몸의 의미

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 신과 함께 먹고살기(4)


| 일러두기 |
 서적·영화는 《 》, 논문·언론·그림은 < >, 법·조례는 「 」, 굿·노래는 ‘ ’로 표기하였습니다.



신화로 살펴보는 제주 문명사

1부  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제2장 신과 함께 먹고살기




알몸의 의미



산방산


설문대할망은 한라산을 베개나 의자처럼 사용하였는데 그때마다 뾰족한 산꼭대기가 몸을 찔러대자 화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큰 손을 휘둘렀다. 내두른 손에 맞은 한라산 꼭대기가 사계리沙溪里로 날아가 턱 하고 자리 잡으니 그날로 산방산이 되었다. 놀랍게도 산방산의 밑동 둘레와 한라산 분화구의 둘레가 일치한다고 한다. 한라산 꼭대기가 날아갈 때 튄 거대한 흙덩이들은 바다에 떨어져 가파도, 마라도, 형제섬이 되었다. 할망은 움푹해진 한라산을 만족스럽게 깔고 앉아 바다에 빨래를 하였다. 할망이 지닌 옷이라고는 화산 불씨를 끄며 잔뜩 헤진 치마 한 벌뿐이라 빨래를 할 때마다 창피가 막심이었다. 할망이 민망함에 자세를 바꿀 때마다 하얀 거품과 함께 바다가 뒤흔들렸다. 할망은 종종 따분할 때에도 물장구를 쳤는데 그때마다 커다란 파도가 요동쳤다. 바다로 나가 뱃물질을 하려던 제주인들은 할망 때문에 몰아치는 거친 파도에 휩쓸리기 일쑤였다. 할망이 참았던 오줌을 폭포처럼 쏟아낸 곳은 조류가 빨라 물살을 헤쳐 나가기 어려웠다. 대표적인 곳은 성산과 우도 사이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제주인들을 가엾이 여긴 할망은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줄 테니 대신 자신의 거대한 음부를 가릴 수 있는 옷을 한 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 한국속기록학연구원


치마 한 벌로 거대한 몸을 겨우 가려 지낸 설문대할망처럼 제주 원시인들은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으로 몸을 가렸다. 토질이 비옥한 육지에서는 삼을 재배하여 삼베옷을 흔히 지어 입었지만 척박한 화산 토질에는 옷감을 지어낼 원료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가 진수陳壽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제주 고대인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제주를 미개한 오랑캐가 사는 섬이라 하여 주호州胡라고 속칭하였다. 《삼국지》에 따르면 제주 고대인들의 행색은 다음과 같다.


“키가 작고……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옷은 가죽으로 만들어 입었는데,
상의만 있고 하의는 없어서 거의 나체와 같다.”


제주를 방문한 고대 중국인들이 제주인들의 행색을 미개하다 평가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복식을 갖춰 입은 상태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중국인들의 차림새를 본 제주 선인들은 자신의 남루한 행색에 초라함을 느꼈던 것 같다. 해상교역이 발달한 이래로 제주가 줄곧 삼베와 비단 등의 옷감을 받길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전설로 돌아와 설문대할망이 옷을 요구하는 장면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비교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다. 음부를 드러내는 데 개의치 않는 짐승 상태의 원시인에서 벗은 몸을 가리지 못하는 데에 수치심을 자각하는 사회적 존재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던 아담과 하와는 신이 공들여 빚은 최초의 인간이었다. 그들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에덴동산에서 유일하게 먹는 것이 금지되었던 선악과를 베어 물고 혼란에 빠졌다. 태초의 자연 상태에서는 알 수 없던 수치심과 두려움, 선과 악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나뭇잎을 엮어 발가벗은 몸을 가리고 신과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징벌이 두려워 숨는다.


손진태孫晉泰의 《조선신가유편朝鮮神歌遺篇》에 수록된 함경남도 서사무가 ‘창세가’에도 미륵이 세상을 창조한 후 산에서 칡을 캐 그 껍질로 옷을 짓는 대목이 있다. 세계 도처의 신화에서 직조 행위가 여신의 창조 능력으로 대변되는 가운데 설문대할망은 옷을 직접 지어 입지 않고 제주 사람들에게 부탁하였다. 이는 설문대할망의 여신으로서의 무능과 미완의 창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벗은 몸에 대한 수치심은 인간 자의식의 발전을 나타낸다. 타인의 시선에 비치는 자신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제주 신화로 돌아와 음부를 가릴 수 있는 옷을 지어달라는 여신의 부탁이 상징하는 것은 집단 사회화 과정이다. 인류가 원시 상태의 자연과 자유로움을 내려놓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발적으로 속박의 옷을 입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문화의 태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참고문헌


<東夷傳> 韓條, 《三國志》 魏書.

《한국의 해양문화 5: 제주해역》, 해양수산부, 2002.

Jordan B. Peterson, 12 Rules for Life: An Antidote to Chaos, 강주헌 역, 《12가지 인생의 법칙: 혼돈의 해독제》, 서울: 메이븐, 2017.


사진 출처 | pixabay.com; unplash.com; 한국속기록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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