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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Oct 24. 2021

바람, 바다, 바람

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 신과 함께 먹고살기(3)


| 일러두기 |
 서적·영화는 《 》, 논문·언론·그림은 < >, 법·조례는 「 」, 굿·노래는 ‘ ’로 표기하였습니다.



신화로 살펴보는 제주 문명사

1부  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제2장 신과 함께 먹고살기




바람, 바다, 바람




역사적으로 해상 교통이 발달한 문명은 반도나 섬이 많은 환경에 놓여 있다. 고대 그리스의 미노스 문명과 미케네 문명 등이 그러하다. 사방이 바다로 막힌 제주 역시 해상 교통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후가 온화하고 조류가 거의 없는 지중해 연안과 달리 기상 조건이 좋지 않았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던 제주인들의 뛰어난 항해술은 사서史書 《삼국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대륙과 해양 간 기압 차가 큰 다풍多風과 강풍의 섬에서 날카로운 암석 해안으로 배가 드나들기란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선박 제작 기술이 발달하였다. 제주 전통 배로는 뗏목을 엮어 만든 테우가 가장 흔하였고 거룻배, 덕판배, 풍선風船 등도 있다. 형태는 사빈 해안에서 출항하기 쉽도록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 많았다. 지금도 해수욕장이나 바다 인근 관광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테우는 인근 연안에서 물질을 하러 나갈 때 타는 뗏목배다. 테우란 뗏목배를 제주어로 표현한 것이며 떼배, 터위, 테위 등으로도 불린다. 테우는 과거에 제주 어촌에서 집집마다 만들던 통나무배로, 원래는 부력이 뛰어난 구상나무로 만들다가 1960년대에 들어 구상나무가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방품림으로 심은 삼나무를 이용하게 되었다.


좌) 테우, 우) 덕판배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grandculture.net)


테우가 인근 연안에서 사용되었다면 덕판배는 원거리 항해에 사용되던 목판배다. 덕판배는 날카로운 암석해안을 견디기 위하여 평평한 덕판 밑에 통나무 보호대를 대어 만들었는데 돛, 노, 키 외에도 부동식 닻인 풍을 더하여 원거리 항해에 이점이 있었다. 덕판배는 높은 파도에도 오뚝이처럼 되돌아오는 복원성과 충돌에 강한 내구성을 지녀 “싸움판 배”라고도 불렸다. 무역선으로 사용되던 덕판배는 고려시대부터는 공물을 바치기 위한 진상선進上船으로 활용되었다. 진상품 중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말과 소였다. 파도에 놀라 날뛰다 외피에 흠집이 나거나 멀미로 인하여 병이 들고 살이 빠지면 제주목사와 테우리牧者에게 죄를 물었다. 상태가 불량한 우마는 다시 채워서 봉진 하거나 돈으로 배상해야 하였는데, 덕판배의 구조 상 5톤이 넘지 않는 소형선으로 제작될 수밖에 없어 가장 커다란 6파六把 크기의 배에 말 33마리밖에 싣지 못하였다. 덕판배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본형으로 개량되며 지금은 원형은 물론 개량종마저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제주인들에게 바다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고립의 불편함을 동시에 주는 양면적 존재다. 제주에서 바다는 곧 밭의 연장선이라는 의미에서 바당밭이라고 불린다. 바당밭에서는 포작鮑作 내지 해녀가 물질을 통해 전복을 비롯한 해산물을 채취하였고 배를 타고 연안 어로를 따라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섬 주변 해역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조류와 바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표류되기 쉬웠다. 변화무쌍한 날씨와 파도를 견디고 인근 대륙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주 선인들은 제주의 거센 바람과 거친 파도가 여신들 때문이라 여겼다. 



설문대할망이 대지의 풍요를 담당하는 모신母神이라면 영등할망은 바다의 풍요와 안전을 담당하는 여신으로 해조류나 어패류의 씨앗을 뿌려 다음 해 수확을 돕고 어부들을 수호한다. 바다에 씨를 뿌려 어패류가 자란다는 제주인들의 상상력에는 제주의 환경적 특성이 드러난다. 제주에서는 땅과 바다가 하나의 거대한 밭이었지만 귀한 생수와 척박한 화산 토질 때문에 땅보다 바다가 삶의 터전에 더욱 가까웠다. ‘영등굿’에서 ‘씨드림’이라는 제차第次는 좁쌀이나 수수의 씨를 바다에 뿌리며 해산물의 풍흉을 점치기 위한 것이다. 이때 어촌민들은 영등할망에게 미역, 보말, 소라, 전복, 해삼 등의 씨를 뿌려 풍성한 해산물을 수확할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며 바당밭에 부는 꽃샘바람이 부디 잔잔하길 바랐다.


영등할망은 설문대할망처럼 제주에서 터를 잡고 사는 토착신이 아니라 내방신來訪神이다. 신화에 따르면 영등할망은 매년 겨울에서 봄이 되는 시기에 식구들을 데리고 제주 서쪽으로 들어와 동쪽으로 나간다. 제주에 와서는 식구들과 바닷가를 돌면서 보말을 까먹어서 음력 2월 보말은 속이 텅 비어 있다고 한다. 영등할망이 제주에 올 때 딸과 동행하면 기분이 좋아져 날씨도 좋지만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잔뜩 성말라 짜증을 내는 통에 날이 궂어진다. 이는 마치 시베리아 북서풍이 일으키는 꽃샘추위를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보아하니 아마 영등할망이 딸보다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날이 잦은 모양이다. 영등할망을 섬기는 어촌에서는 음력 2월마다 배의 출항이 금기시되고 옷에 풀을 먹이는 것도 삼가는데 영등할망이 자주 노하는 까닭에 풍랑이 거세 배가 자주 파선되고 날이 궂어 옷에 구더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영등할망이 제주를 떠날 때는 어패류의 씨를 뿌려 사람들이 수확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영등할망이 떠나고 나면 청명淸明이 와 험한 바다가 잔잔해지고 땅밭에도 씨가 뿌려진다. 초봄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한 영등할망 신화는 제법 사실적이지만 거센 파도와 변화무쌍한 조류에 대한 설문대할망 설화에는 장난기가 잔뜩 배어 있다.







참고문헌


한반도 해양문화 원형>, 《멀티미디어 제주민속관광 대사전》.

한승철, <역사 속의 제주 물류>, 《제주발전연구》 제12호, 제주발전연구원, 2008.


사진 출처 | pixabay.com;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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