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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Oct 24. 2021

바당밭에서 시작된 신석기 혁명

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 신석기 혁명과 여신의 죽음(2)


| 일러두기 |
 서적·영화는 《 》, 논문·언론·그림은 < >, 법·조례는 「 」, 굿·노래는 ‘ ’로 표기하였습니다.



신화로 살펴보는 제주 문명사

1부  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제3장 신석기 혁명과 여신의 죽음




바당밭에서 시작된 신석기 혁명



제주 선인들은 풍요와 빈곤이 병존하는 삶을 살아왔다. 척박한 화산암 위로는 아무리 물을 대도 여린 곡물 싹을 틔우기 어려웠지만 바다에는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였다. 그러나 제주의 거센 바람과 변덕스러운 날씨는 대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았다. 땅밭에서 맞이하는 비바람은 불편을 야기할 뿐이지만 바당밭에서 맞이하는 자연현상은 생사의 기로를 가를 만큼 위험한 존재였다. 잠녀潛女라고도 불리는 제주 해녀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다. 《삼국사기》에는 제주의 옛 이름인 섭라涉羅에서 해녀가 진주를 진상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제주에 해녀문화가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예전에는 해녀 외에도 남성 잠수부인 포작이 존재하였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대다수 포작들이 제주를 떠나는 바람에 해녀가 그 자리를 메꾸게 되었다.


제주 원담(원, 개, 통) | 한국콘텐츠진흥원(culturecontent.com)


제주에는 썰물 때가 되어 물이 빠지면 갯바위에 둥근 호 형태로 막힌 바닷속 돌담, 즉 원이 보인다. 육지를 향하여 움푹 파인 만을 활용하여 돌담을 쌓으면 밀물에 고기떼가 몰려들었다가 썰물 때 안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한다. 이때 마을 사람들 중에서 원을 쌓거나 보수하는 데 참여했던 주민들만이 원 안의 고기를 잡을 수 있다. 바닷속 돌담, 즉 원이 물때에 맞춰 물고기를 가두는 돌 그물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이형상의 《남환박물》에는 제주에서는 바다가 모질어 어망을 사용하는 이가 없다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제주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나가서도 오직 낚시로 고기잡이를 하였다. 


제주 사람들이 어망을 사용할 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에 민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제주로 향하던 최영崔瑩 장군은 거센 풍랑을 만나 추자도로 대피하여 잠시 지내게 되었는데, 이때 최영 장군이 추자 주민들에게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어로 생활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 주민들이 장군의 위덕을 기리는 마음으로 사당을 지어 매년 봄과 가을에 풍어를 빌며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330년 뒤, 이형상이 조선시대에 제주에서 어망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기록을 남긴 까닭은 크게 세 가지 경우로 해석된다. 첫째는 먼바다에서 그물질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였을 가능성이고, 둘째는 이형상 목사가 신당 철폐, 무속 신앙 파괴 등으로 도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다 신분제로 인하여 민간의 풍습을 잘 알지 못하였을 가능성이다. 셋째는 삼과 면화가 나지 않던 제주에서 섬유가 귀해 어망 제작을 서서히 줄여 나갔을 가능성이다. 이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셋째다. 삼과 면화가 나지 않던 제주에서는 의복마저 변변치 않아 기생이나 창녀를 제외하고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부유한 집에서도 칡의 껍질을 벗겨 만든 섬유로 옷을 지어 입었으며 남자든 여자든 아래에 속곳만 걸친 채 볼기를 내놓고 다녔다. 제주에서는 전통적으로 손줄 낚시를 할 때 면사 세 겹을 꼬아 풋감 즙을 들이고, 그 위로는 삭힌 돼지 피를 발라 말린 뒤에 솥에 쪄내 건조하여 낚시 줄을 만든다. 이러한 번거로움을 무릅쓰던 까닭은 낚시 줄이 끊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그물을 사용한 시기는 조선말에서 대한제국 시기에 들면서부터다. 1890년대에 일본의 면방적업이 크게 발전하며 면사망이 대중화되자 교역을 통하여 한국에 들어왔으며 제주에서는 1920년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상모리유적 발굴 조사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grandculture.net)


한편 제주 청동기시대 유적지인 서귀포 대정읍 상모리유적 패총 구역에서 어망추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되어 혼선이 있었다. 상모리 패총이 바다와 불과 20m 거리에 해안 사구에 감싸인 모래층에 있다는 점에 미루어 어망추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어망추라는 해설은 발굴 초기에 언급되었을 뿐 추후 석제팔찌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모양이 비슷하여 생긴 해프닝으로 보인다. 실로 상모리 집단이 한반도에서 이주하여 온 농경 집단이었으며 도내 선사 유적지에서 어망추가 발견된 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상모리 패총에서 출토된 유물은 어망추보다 석제팔찌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여 보인다.


《남환박물》보다 앞서 1681년 발간된 이증李增의 《남사일록南槎日錄》에서는 제주 한경면 용수리의 부게원이 “우포友浦”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이곳의 원이 포구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후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원은 후릿그물 어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화산암을 쪼개고 쌓아 올려 원을 만들고 물때에 맞춰 고기잡이를 하는 제주의 어촌 풍경에서 설문대할망이 음문을 열고 닫으며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 한라산의 화산 폭발이 설문대할망의 방귀였다는 제주 선인들의 상상력을 감안할 때 결코 동떨어진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제주에서는 이르면 신석기시대부터 해류와 계절풍을 이용한 해상 교역을 해 왔다. 제주 고대 해상 교역은 유물과 문헌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제주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사서史書 《삼국지》에 따르면 제주 고대인들은 원삼국시대에 이미 활발한 해상 교역을 하고 있었고 항해술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므로 원삼국시대 이전부터 선박 축조 기술과 항해술을 발전시켜 왔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유적 조개더미 4개소에서도 일본산 석기와 토기가 출토되어 두 지역이 고대로부터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보여준다. 1928년 제주 산지항 공사 당시 용암대 아래에서 발견된 청동 거울, 구리칼, 돌도끼 등과 중국 한대韓代 화폐 대천오십大泉五十, 오수전五銖錢, 화천貨泉, 화포貨布는 모두 기원전 1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668년 탐라국 시기 일본에게 비단, 옷감, 도자기, 오곡 종자를 받아왔고 738년, 905년에는 답례품으로 탐라포耽羅脯와 탐라복耽羅鰒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지항 출토 한대 화폐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grandculture.net)


제주에서 바다는 바당밭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고대로부터 제주인들의 생활 터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제주인들은 예로부터 바다풀을 보고 흉풍을 가늠하여 왔는데 가령 미역이 풍년이면 농작물은 흉년이 든다거나 청각靑角이 풍년이면 태풍이 심하다는 말이 속담처럼 전승되고 있다. 본토에서는 농경 생활을 필두로 농작물의 풍요를 비는 신앙이 탄생한 반면 제주에서는 해녀와 어부의 안전을 빌고 해산물의 풍요를 비는 신앙이 발달하였다. 설문대할망이 신화가 아닌 전설로 남게 된 까닭도 바다가 원시 생업의 주축이 되었던 것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80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된 제주칠머리당굿은 제주 건입동에서 어업의 풍요와 어부 및 해녀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당신堂神과 함께 영등할망을 모시는 당굿이다. 본향당이 있는 곳의 지명이 칠머리라서 칠머리당굿이라 부른다. 건입동 칠머리당에서 모시는 당신은 부부신夫婦神으로 마을의 생산 활동 및 호적戶籍과 장적葬籍을 보살피는 남신 도원수감찰지방관都元帥監察地方官과 어부와 해녀의 생업을 수호하는 여신 요왕해신부인龍王海神夫人이다. 특이한 점은 본향당신 굿 보다도 영등할망을 모시는 굿이 중점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제주에서 영등굿은 바다의 평온과 어업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어촌마을 전역에서 이뤄진다. 건입동이 어촌인지라 영등할망을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것으로 해석된다. 건입동 주민들은 어업의 풍요와 해상 안전을 빌기 위하여 도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영등굿을 칠머리당굿에 포함시켜 진행하고 있다.


신석기 혁명이 농경 기술의 발달로 인한 정착 생활에서 시작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기는 하나,


제주의 신석기 혁명땅밭이 아닌 바당밭에서 시작되었다.


제주의 고인돌과 고대 유적지는 주로 해안지대와 하천 변에 분포되어 있다. 국내 최고最古의 신석기 유적지와 조개더미에서도, 유적마다 다량 출토된 고토기古土器에도 곡식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각종 어패류와 불에 탄 산야초 열매가 전부다. 이러한 사실은 제주 신석기 집단의 정착이 화산섬이라는 특수 환경에 맞춰 본토와 달리 바다에서 시작되었음을 방증한다. 농경이 어려웠던 제주에서 바다를 중심으로 시작된 신석기 혁명의 특유한 흐름은 훗날 제주가 독자적인 해녀문화를 필두로 한 해양문화를 형성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金尙憲, 《南槎錄》, 1669.

李衡祥, <風俗>, 《南宦博物》, 1704.

<高句麗 本紀>, 《三國史記》 卷十九.

<天智紀> 八年 三月, 《日本書紀》.

<산업·경제>, 《제주도지》 제4권, 제주: 제주도, 2006.

<최영 장군 사당>,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1호, 제주 추자면 대서리.

<한국의 해양문화 5: 제주해역>, 해양수산부, 2002.

Joseph Campbell, The Masks of GOD Vol. I: Primitive Mythology, 이진구 역, 《신의가면 I: 원시 신화》, 서울: 까치글방, 2002.


사진 출처 | pixabay.com; 한국콘텐츠진흥원(culturecontent.com);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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