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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Oct 24. 2021

먹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 신석기 혁명과 여신의 죽음(3)


| 일러두기 |
 서적·영화는 《 》, 논문·언론·그림은 < >, 법·조례는 「 」, 굿·노래는 ‘ ’로 표기하였습니다.



신화로 살펴보는 제주 문명사

1부  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제3장 신석기 혁명과 여신의 죽음




먹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농경 생활이 어려웠던 제주의 환경적 요소는 육식 문화에 대한 멸시와 미식米食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레 이러한 풍조를 소재로 한 신화도 생겨났다. 제주 송당리 마을을 지킨다는 당신堂神 금백주할망 내지 백주또는 바다 건너 강남천자국에서 온 농경의 여신이다. 금백주는 오곡 종자와 마소를 끌고 제주에 당도하여 천생배필을 찾았다. 마침 제주에는 사냥의 신 소천국이 우람한 몸에 가죽옷을 입은 채 수렵을 하며 떠돌고 있었다. 소천국을 만난 금백주는 그와 혼인하고 송당리에 터를 잡아 아들 18명, 딸 28명을 낳았다. 훗날 그 자식들이 손자 378명을 낳은 뒤 마을로 흩어져 당신으로 좌정했다고 한다.


자식들이 밥과 젖을 달라 보채자 뭍에서 가져온 오곡 종자를 경작하기로 결심한 금백주는 소천국에게 농사를 권하였다. 둘은 앞으로 소를 잡아먹지 않고 경작에 쓰기로 약속하였다. 어느 날, 소천국이 소로 밭을 갈고 있었는데 웬 중이 나타나 밥을 달라고 청하였다. 소천국은 새참을 나눠먹자며 자신은 밭을 좀 더 갈고 오겠다고 하였다. 소천국이 밭을 갈다 돌아보니 그 많던 새참이 사라지고 중마저 달아난 뒤였다. 허기져 잔뜩 성이 난 소천국은 밭을 갈던 소를 때려잡아 구워 먹었다. 한 마리를 해치우고도 만족하지 못한 소천국은 주변을 둘러보다 남의 집에서 밭을 갈던 검은 암소를 발견하였다. 잠시 고민하던 소천국은 배고픔을 이기 못하고 옆으로 넘어가 남의 소마저 몰래 잡아먹었다. 잠시 후 소천국을 마중 나온 금백주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소는 보이지 않고 소천국이 대신 밭을 갈고 있는 것이었다. 금백주가 소천국에게 자초지종을 묻자 소천국은 사실대로 모두 털어놓았다. 사실을 알게 된 금백주는 크게 화가 나 버릇대로 가축을 잡아먹는 것도 모자라 남의 집 귀한 암소마저 도둑질했다며 헤어지자 하였다. 집에서 쫓겨난 소천국은 아랫마을로 가서 첩을 두어 수렵 생활을 이어갔고 금백주는 혼자서 자식들을 키우며 농사를 지어 번창하였다.


금백주와 소천국의 이야기는 말기 신석기시대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바다 건너에서 곡식 종자와 선진 문물을 가지고 이주한 씨족 집단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토착 씨족 집단과 혼인을 통해 결합하고 농경 사회로 전환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농경 생활을 시작하며 짐승을 가축화하기 시작하였다는 점도 잘 드러나고 있다. 금백주가 소천국에게 얽매이지 않고 평등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점이나 암소를 수소에 비하여 귀히 여기는 장면에서는 다산과 풍요를 중시하던 모계 씨족 사회의 특징이 드러나고 있다. 금백주와 소천국의 자손들이 각각 마을로 흩어져 당신堂神으로 좌정했다는 내용에서는 원시 신앙의 변천사와 전파 과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바다 건너온 외래신 금백주와 제주 토착신 소천국은 당신堂神이 되었지만 설문대할망은 제주를 창조한 여신이라 불리면서도 결코 마을 신앙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 설문대할망 전설을 마저 살펴보자.







참고문헌


고광민,《제주 생활사》, 제주: 도서출판 한그루, 2016.


사진 출처 | unplash.com


일각에서는 제주 표선리 당개할망 본풀이의 주인공인 세명주할망이 설문대할망과 동일인물이라며 설문대할망이 엄연히 마을 신앙으로 자리 잡은 신화 속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중이나 이 책에서는 현용준을 따라 설문대할망을 세명주할망과 다른 인물로 다루고 있다. 현용준, 《제주도 전설》, 고양: 서문당,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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