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 신석기 혁명과 여신의 죽음(4)
| 일러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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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옷을 바친 제주 사람들에게 실망한 설문대할망은 섬과 본토를 잇는 다리 만들기를 포기한 채 물장구를 치며 시간을 때웠다. 고립된 섬도 모자라 할망이 일으키는 파도에 휩쓸리던 제주인들은 점차 할망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할망의 커다란 덩치와 능력을 시험해 보려 부러 할망의 심기를 거스르는 질문을 해댔다. 약이 오른 설문대할망이 제일 깊다던 용연물에 들어서니 고작 발등에 닿을 뿐이었다. 제주인들은 의기양양해진 할망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곳을 대며 능력을 시험하였다. 하루는 할망이 물장오리물 밑이 바다까지 뚫렸다는 소문을 듣고 물장오리물에 들어섰다. 할망의 가슴께까지 차는 물을 보며 놀란 사람들은 더 앞쪽으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라며 재촉하였다. 물장오리 중심으로 발을 내딛던 할망이 갑자기 삐끗하더니 수면 아래로 풍덩 사라졌다. 놀란 제주인들이 목 놓아 설문대할망을 불렀지만 몇 차례 물거품이 일었을 뿐 할망은 영영 살아 나오지 못하였다.
천연기념물 제517호로 지정된 물장오리오름은 제주도에서 백록담, 영실기암과 더불어 3대 성산聖山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에서는 화산암의 특성으로 인하여 물이 고이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마르지 않는 물장오리오름의 산정호수를 두고 밑이 뚫려 바다와 이어진 신성한 산이라는 전설이 형성된 것이다. 제주인들은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었다는 전설을 따라 물장오리오름 산정호수를 "창 터진 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실 물장오리오름 분화구는 최소 2m에서 최대 58m의 깊이로 밑이 막혀 있다. 놀라운 사실은 분화구를 이루는 퇴적층이 일명 “화산송이”라 불리는 스코리아Scoria로 형성되어 투수성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습지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물장오리오름 산정호수의 직경은 최대 140m이며 수면적은 1.06ha로 도내 산정호수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다. 과거에는 산정호수에서 물을 끌어다 썼던 까닭에 취수 시설이 남아 있지만 현재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찾을 수 없다.
물장오리오름 일대는 2008년에 국내에서 9번째로 람사르 습지에 등재되었다.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면적은 628,000㎡지만 이듬해 환경부에서 지정한 습지보호지역 면적은 610,471㎡다. 습지 일대에는 멸종 위기 야생 동식물과 곤충류 및 제주 고유종 곤충 8종 등 총 180종이 서식하고 있다. 물장오리오름 습지 일대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이하 제주특별법)」에 의하여 “절대보전지역”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자연공원법」에 의거한 “국립공원지구”로 한라산 국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에는 산정호수까지 탐방이 가능했지만 몰려든 탐방객들로 인하여 물장오리오름 동쪽이 심하게 훼손되어 2008년 복구공사를 진행한 뒤 2017년부터 2026년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다시 전설로 돌아와 설문대할망의 또 다른 죽음을 살펴보자. 제주에서 일부 신화론자들은 설문대할망 이야기를 전설이 아닌 신화로 분류하는데, 이들이 주장하는 각편에 따르면 설문대할망은 한라산 오백장군의 모신母神이다. 예년에 없는 가뭄이 이어지던 어느 날, 육지로 양식을 구하러 간 오백장군을 기다리던 설문대할망은 한라산 백록담에 거대한 솥을 걸고 죽을 끓였다. 백록담 둘레를 걸으며 솥을 휘젓던 할망은 그만 발을 삐끗해 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제주에 돌아온 오백장군은 할망을 찾았지만 웬일인지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거대한 솥에 고기죽만 가득하였다. 고된 여정에 허기가 졌던 형제들은 허겁지겁 죽을 먹기 시작하였는데 뒤늦게 죽을 뜨던 막내가 솥 밑바닥에 있던 어머니의 뼈를 보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형제들은 토악질로 속을 모두 게워 내고 슬피 울다가 한라산 영실기암의 돌기둥이 되었다.
제주섬을 창조한 설문대할망의 죽음은 비극적이면서도 자못 허무하다. 전설 속 설문대할망은 제주를 창조하고도 섬과 본토 간 다리를 연결하지 못하고 커다란 몸을 뒤척이다 바다에 풍랑을 일으킨다. 내방신 영등할망이 날씨와 해산물의 풍작을 다스리고, 토착신 소천국은 사냥을 도우며 외래신 금백주가 제주에 정착하여 농경을 보우하는 데도 설문대할망은 자연현상을 통제하거나 관장하지 못한다. 그녀가 참을 수 없는 생리 현상을 해소할 때마다 화산이 폭발하거나 파도가 몰아치고 조류가 소용돌이친다. 심지어 때로는 재미 삼아 물장구를 치거나 화를 참지 못하고 뾰족한 산꼭대기를 날려버린다. 제주인들에게 설문대할망은 척박한 화산섬을 창조하였을 뿐 천덕꾸러기와 다름없던 것이다. 바다가 생업의 터전인 제주인들에게 할망이 무능력한 존재라고 여겨졌기에 그 흔한 당신堂信으로도 좌정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여신이 사라진 자리에 싹을 틔우기 시작한 제주 문화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지만 한 순간의 실수로 사라진 설문대할망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태초의 거대 여신 설문대할망은 그렇게 허무한 죽음만 조각조각 전해질뿐, 제주에서 흔한 마을 신앙으로도 추앙받지 못하고 제의에도 제외된 채 기억 너머로 사라졌다. 설문대할망 전설의 허무하고도 비극적인 결말에서 태초의 천혜 자연이 선사하는 소중함을 잊고 무분별한 개발을 거듭하는 인류의 모습이 떠오르는 까닭은 왜일까?
참고문헌
현용준, 《제주도 전설》, 고양: 서문당, 1976.
사진 출처 | pixabay.com; 문화재청(heritage.go.kr); 제주특별자치도 공보관
본서에서는 설문대할망을 세명주할망과 다른 인물로 다루고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 따라 설문대할망 설화를 다른 신화들과 달리 전설로 분류하여 서술하였다. 일각에서는 제주 표선리 당개할망 본풀이의 주인공인 세명주할망이 설문대할망과 동일인물이라며 설문대할망이 엄연히 마을 신앙으로 자리 잡은 신화 속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중이나 이 책에서는 현용준을 따라 설문대할망을 세명주할망과 다른 인물로 다루고 있다.
현용준, 《제주도 전설》, 고양: 서문당,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