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 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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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는 총 두 번 있었다.
첫째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원시시대의 순수한 숭상이었고 둘째는 문명의 발흥기에 권력에 대한 경외심을 형성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우상 숭배였다. 이 책에서는 제주의 첫 번째 신화시대를 소개하기 위해 우선 제주섬을 창조한 거대 여신 설문대할망을 소환하였다.
먼 옛날 원시인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이동 생활을 하며 수렵, 채집을 통해 연명하였다. 이후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비로소 한 지역에 정착하고 씨족 단위의 집단생활을 시작하였다. 농경사회에서는 수확량을 늘리기 위하여 넓고 비옥한 땅, 많은 노동력이 필수적이었으므로 출산율은 곧 씨족 집단의 성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제1의 물결”이라고 일컫는 시기까지 인류는 모계 중심의 씨족 문화를 형성하고 풍요와 안전을 기원하는 대지모신大地母神 신앙을 발전시켰다.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집단 간의 문화 차이도 발생하였다. 가축화에 성공한 집단이 수렵 집단과 인간이 직접 농작하는 농경 집단보다, 작물화한 집단이 채집 집단보다 우수하였다. 식문화는 미식米食이 육식肉食보다 우수하였다. 신앙으로는 동·식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 자연의 신과 령을 믿는 애니미즘, 공인된 샤먼의 세습 체계를 갖추고 신과 조상에게 치료, 장례, 제사를 지내는 샤머니즘 순으로 뒤로 갈수록 관념 수준이 발전하였다.
이 책에서는 제주의 오래된 자연과 원시인들의 정착 과정, 문화 형성기의 풍경을 조망하고자 하였다. 시대로 따지면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이 시기를 제주의 첫 번째 신화시대로 설정하고 설문대할망 전설을 중심으로 영등할망 신화, 금백주와 소천국 신화를 곁들였다. 신화의 보편성을 상기할만한 서구 문명의 신화도 일부 언급하였다. 다음 책에서 다룰 내용은 제주의 두 번째 신화시대로, 제주에서는 무문토기시대라고 일컫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까지의 제주 고대인들의 생활상이다. 이번 책에서 그러하였듯 제주 설화와 역사를 오가며 제주 문명의 형성기를 소개할 것이다.
지역 설화로 지역 문명사를 소개하는 <<신화로 살펴보는 제주 문명사>> 프로젝트는 제주에서 필자가 최초로 진행하는 작업이다. 감사하게도 계획 단계에서 제주학연구센터의 과분한 심사 평가를 받아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제주 신화를 비롯한 민담과 전설, 서사무가를 제주 문명사에 더하여 차례로 집필하고는 있지만 신화학이나 국사학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다. 서문에서도 밝혔다시피 필자는 신화와 역사에 보편성과 특수성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미시적인 관점에 무게를 두는 해석을 최대한 지양하고 정치학의 거대 담론에 많은 부분을 의탁하고자 하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총 4파트로 구성된다. 이 책에서 다룬 첫 번째 신화시대, "원시시대"를 시작으로, 다음으로 두 번째 신화시대를 제주 문명의 발흥기, "무문토기시대"와 함께 소개한 뒤 "탐라시대"와 "제주시대"까지 총 5,000여 년의 지역사를 네 부분으로 나누어 차례로 다룬다. 제주는 섬이라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바닷길이 열린 이래 대륙과 곳곳의 섬을 오가며 각양각색의 문화를 수용하여 몸집을 불렸다. 다양한 문화와 융합하며 발전해 온 제주 문화는 지극히 독자적이지도, 대단히 보편적이지도 않다. 그렇기에 제주를 탐색하는 것은 이 섬이 품고 있는 다양한 문화를 탐구하는 것과도 같다.
일만 팔천 신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제주도에서 활화산의 원시인들이 도시인들로 변화를 거듭할 때까지, 오랜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기제를 찾아 함께 떠나자.
이를테면 제주는, 현재도 채록 중인 대규모 백과사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사진출처 | un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