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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소포인트 Aug 02. 2022

작은새와 돼지씨

작은새와 돼지씨 (작은새와 돼지씨, 2021)

작은새와 돼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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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새와 돼지씨>(2021)에 대해 떠올리면 언제나 그때가 생각난다. 영화제에서 처음 <작은새와 돼지씨>를 보게 되었는데 당시는 GV가 예정된 상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주인공 김춘나(작은새)와 김종석(돼지씨) 부부가 참석해서 인사를 하고 간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흔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상영 끝 무렵에 벌어진 일은 영화제가 아니었으면 경험하기 힘든 것이라 기억에 남는다. 김종석 씨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기도 전에 불현듯 벌떡 일어서더니 보러 와 줘서 고맙다 말하면서 박수를 유도하고는 아직 어두컴컴한 영화관을 나가버린 것이다. 나는 김종석 씨의 그런 행동이야말로 <작은새와 돼지씨>를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기회이자 영화가 지닌 물성을 극대화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76여 분의 영화 보기를 단 1분 만에 압축한달까. 나는 일종의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영화의 제목 그대로 ‘작은새와 돼지씨’라고 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영화의 정수는 오직 작은새와 돼지씨, 이 두 사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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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석 씨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른 때 같았으면 무례하게 비칠 수도 있는 행동이 가능한 건 바로 (당연히) 주인공과 감독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딸의 영화가 아니었더라면,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에피소드는 생길 수 없었다. (역시 당연하게도) <작은새와 돼지씨>는 이렇듯 주인공과 감독의 관계가 없었더라면 성립 불가능한 영화다. 그러니 카메라는 관계를 부러 숨기려 하지 않는다. 숨겨질 수 없는 영화기도 하고. 여기서 흥미로운 건, 정작 <작은새와 돼지씨>는 관계를 매개로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딱 하나, 부부의 예술 행위와 과정을 오롯이 기록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카메라의 위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주인공 부부 는 카메라를 인식하고 있고 이따금씩 감독이 카메라 앞에 등장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존재나 자의식 역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영화 안에서 직접 무언가를 해내려고 하는 건 아니다. 카메라 뒤 감독은 오직 부모와의 관계 그 자체만을 드러낼 뿐이며, 자신의 영화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스스로 가이드만 제시할 따름이다. 영화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주체가 부부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작은새와 돼지씨>의 카메라는 관찰자의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주체성을 망각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지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메라를 든 딸과 부부는 경계가 흐릿한 상태로 뒤섞인 채 영화 안에 서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마지막, 부부와 함께 바닷가를 가는 장면이다. 비 오는 날 바다에서 그들은 춤을 춘다. 그러다 어느새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돼지씨(장면의 성질에 따라 그들을 본명으로, 혹은 별명으로 칭할 예정이니 그 점 미리 알린다.)로 바뀐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돼지씨와 작은새가 춤을 추었으니 마지막으로 춰야 하는 인물은 딸이기 때문이다. 이 아무렇지도 않은 전환, 그 어떤 목적이나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제시되는 이 시퀀스야말로 앞서 말한 <작은새와 돼지씨>의 성질과 카메라의 위치를 가장 단적으로 구현하는 핵심적인 장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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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새와 돼지씨>의 가장 핵심적인 존재가 주인공들이라면 또 하나 언급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예술’ 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영화는 왜 그들의 예술 행 위를 기록하려 하는 걸까? 이 지점에서도 <작은새와 돼지씨>는 돋보인다. 누군가의 예술행위를 그려내는 영화들은 으레 그렇듯 예술이란 존재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예술을 지속하는 것 자체에 숭고함을 부여하려고 한다. 그러나 <작은새와 돼지 씨>는 그런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그저 주인공 부부가 과거에 쓰고 그렸던 편지나 작품, 혹은 그들이 기획하는 전시회 준비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노동으로서의 예술’과 같은 프레임도 거부한다. 비록 ‘예술’과 ‘일상’으로 단어는 구분되어 있지만 <작은새와 돼지씨>는 인물의 위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처럼 이 두 단어를 겹쳐 버린다. 그들에게 일상과 예술 은 그다지 분리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영화는 일상과 예술, 둘 중 어느 하나의 의미에 서로를 포섭하지 않게끔 한다. 영화 전반을 유지하는 이 양가적 태도를 조금 더 뜯어보도록 하자. <작은새와 돼지씨>는 이처럼 각자의 주체를 유지하면서도 붙어있는 양가의 상황을 디졸브의 방식으로 구현한다. 디졸브는 서로 다른 존재가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의 언어다. 그리고 3명의 인물은 각기 저마다의 언어로 이 디졸브를 감각화한다. 감독은 디졸브 그 자체로, 돼지씨는 자신의 말로, 작은새는 그림을 덧칠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감독이 부부에게 자신을 예술가로 인식하는지 묻는 장면을 보자. 예술에 대해 가장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질문에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돼지씨가 김춘나를 존경하는 예술가라고 밝히는 대목이다. ‘손끝에서 연애편지를 써서 예쁜 그림과 예쁜 글씨 속에서 내가 마음이 변하여 오늘날까지 왔기 때문에, 그 그림이 지금은 자기 자신을 불태우고 있다고..’ 일상과 예술의 디졸브를 이것만큼 잘 표현하는 언어가 있을까? 작은새 역시 현대 예술의 좋은 점을 논하면서 실수를 하더라도 다시 덧칠하여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두 가지의 그림이 겹 쳐져 겹친 그대로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는, 디졸브의 미술적 구현을 예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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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양가성을 보여주는 가장 큰 중핵은 ‘작은새와 돼지씨’ 그 자체다. 예의 마지막 시퀀스로 다시 돌아가자. 돼지씨는 춤을 춘 다음, 작은새에게 자신처럼 춤을 추라고 권유하면서 감독에게 ‘동영상 하나 찍어라’라고 말한다. 이 말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자신이 ‘영화’에 출연한다는 사실조차 그다지 의식하지 않은 채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 문이다. 물론 혹자는 그냥 편의상 말을 건넨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돼지씨의 이 말이 중요해진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와 ‘동영상’의 구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저 ‘편의’야말로 양가성의 영화로서 가능케 한 가장 핵심적인 장치다. 영화관에서의 김종석 씨의 행동, 아니 일종의 퍼포먼스는 그래서 가능해진다. 김종석 씨는 자신의 퍼포먼스로 <작은새와 돼지씨>가 비록 영화의 형태로 상영되고 있지만 영화관의 규칙을 넘나 들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와 자신의 일상이 뒤섞여있음을 선언한다. 그는 전시회에서 자신의 직업인 경비원의 복장을 한 채 시를 낭송한다. 그리고 그가 참석한 모든 GV와 그날의 상영관에서도 그 옷을 입고 등장했었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작은새와 돼지씨>가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하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과장된 평가일까. 이는 현실과 영화 사이의 진실성이나 기록의 순수성, ‘모든 것이 영화’와 같은 진부한 수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안 돼지씨와 영화 밖 김종석을 동시에 수렴할 수 있는 영화는 스스로 영화라는 자의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역설에 대한 이야기다. 이 가능성 앞에 우리는 오래된 새 질문을 다시 꺼내게 된다. ‘(플랫폼 시대의) 영화란 무엇인가?’. <작은새 와 돼지씨>는 영화관의 경험을 부여받지 못했던 이들의 문법을 체화한다. 그리고 외려 영화에 대해서 지시하게 만들어 영화를 가로지르는 기준을 무화시킨다. 그게 바로 이 시대의 영화가 가지는 위치이고 <작은새와 돼지씨>는 그런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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