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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글 Oct 02. 2023

쉐이드트리

자기만의 그늘 같은 곳이 있나요?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타 본 적 있으신지. 내게는 두 번의 경험이 있다. 몇 년 전 가족들과 함께 갔던 홍콩에서 아무 트램에나 올라타 종점까지 찍고 돌아오는 여행을 한 번, 그리고 2013년 봄 어느 일요일 아침 즉흥적인 시내버스 여행으로 한 번.






어린 사회인 시절, 나는 고민이 참 많았다. 그리고 월요병이 아닌 일요병을 앓았다. 바쁜 한 주를 보내고 긴장이 풀려 그랬는지 휴일 마지막 날만 되면 축 늘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하루를 흘려보내는 게 무의미하고 아깝다는 생각이 들던 어느 날, 별안간 벌떡 일어나 가방을 둘러메고 일단 밖으로 나갔다. 무작정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으며 어디든 가자고 마음먹었다. 내키는 곳이 없으면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이라도 찍고 돌아올 심산이었다.


한적해 보이는 버스를 골라 타고, 맨 뒤 창가 자리에 기대앉아 음악을 틀었다.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창밖으로 사람들의 일상과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덜덜 거리는 엔진 소음이 뒤섞인 음악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에 흘러들었다. 여행이 시작되기 직전에 느끼던 종류의 설렘. 어딘지는 몰라도 그저 계속 가고 있다는 감각이 안정감을 주었다. 살짝 열린 차창으로 날아드는 포근한 바람에 눅눅했던 마음도 뽀송하게 말라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달려갔을까. 시원한 커피 한 모금이 간절해졌을 무렵 안양 1번가에 내렸다. 조금 걷다 고소한 커피 향기에 이끌려 다다른 작은 카페 이름은 쉐이드트리.(Shade Tree) 빛바랜 간판, 접혀있는 노란 차양 아래 그늘진 공간 앞의 작은 창과 문 사이에 서서 시계를 보니 때마침 오픈 시간인 11시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들어가자 좁고 깊은 실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밝고 따뜻한 느낌의 오크우드 색감을 배경으로 입구에서부터 즐비된 작은 테이블마다 아기자기하게 설치된 조명들. 귀여운 가랜드와 소품으로 장식된 벽. 우측에 비치된 크고 작은 커피 기구들이 보였다. 조금 더 끝으로 가면 개방된 미닫이문 안쪽으로 또 하나의 작은방 같은 공간이 있었다. 나는  문지방을 넘자마자 우측 가장자리 위에 달린 스피커 바로 아래쪽에, 벽을 마주 보고 앉는 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맨 끝 쪽엔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보통 창가 자리를 선호하는 편인데 이곳의 창은 특별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면, 천장 중앙에 직사각형의 두꺼운 유리창이 나있었다. 상당히 근사한 곳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잠시 후 직원이 가져다준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나는 완벽하게 행복해지고 말았다. 정말 맛있었다. 비밀스럽고 안락한 다락방 같은 그 공간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그날 이후 그곳을 나만의 비밀 아지트로 정했다.




지쳤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정체되고 싶지 않을 때, 혹은 아무 때나 자주 그곳에 갔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주로 샷 추가한 아이스 더치커피와 젤라토 한 덩어리가 올라간 수제 2분의 1 와플을 먹었다. 이곳에 숨어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머리 위 스피커에서 크게 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멍 때리고,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면서 느릿느릿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곤 했다.




비가 오는 날엔 머리 위 창문으로 듣기 좋게 묵직한 빗소리가 내렸다. 올려다보면 빗방울이 뚝뚝 떨어져 번지는 모양이 보였다. 대부분 별다른 일정 없는 매주 일요일마다 주말 오전 오픈 시간에 맞춰 가거나 가끔은 특별한 평일 저녁에 가는 날도 있었다.




일요일 오전 11시. 단골손님이 된 내가 카페로 들어설 때마다 늘 앉던 그 자리로 먼저 달려가 계절에 맞게 온도를 맞춰주던, 한가할 때마다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던 예쁘고 따뜻한 직원의 사려 깊은 발걸음. 상냥했던 사장님. 손님이었음에도 늘 감사했던 날들. 언젠가 보답으로 꼭 작은 선물을 드리리라 생각만 하며 수년을 드나들다 몇 달 못 간 새, 2015년 겨울 그곳은 문을 닫았다.






혼자서 방황할 때  나를 품어주던 공간. 지친 마음이 쉬어가던 그늘 같은 곳. 모든 계절 동안 안정을 취하던 그곳에서의 날들이 내 안에 겹겹이 쌓여 여전히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영혼의 지도가 있다면 주요 장소로 표시해 두고픈 영역이다.


내게는 언젠가 아주 먼 훗날 그곳을 꼭 닮은 그늘 같은 공간을 직접 재현해 보고픈 꿈도 있다. 어느 봄날 정처 없이 걷다 문을 열고 들어선 카페에서, 마치 킹스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을 통과해 호그와트로 가던 해리 포터가 된 듯 비밀스레 해방감을 느끼던 그때의 내가 그랬듯, 그저 존재함으로써 누군가의 도피처가 되고 치유해 주는 따뜻함을 품은 그런 장소.


자기만의 그늘 같은 곳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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