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잠들지 않는다 2

by 킥더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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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운세
오늘 하루 말과 행동을 조심하세요. 부주의함으로 중요한 인연을 놓칠 수도 있고, 사소한 실수로 금전적 손실을 입을 수도 있는 운입니다.

“뭐야! 좋은 것 좀 나오지. 찜찜하게시리.”
마리는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운세를 확인했다. 출근하면서 사온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신다. 마리는 1년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한 마리는 과학서적 전문 번역가이다. 다른 분야 번역은 의뢰가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지금은 과학 분야 번역에 집중하여 입지를 다져야만 하는 시기다. 언젠가는 번역하는 분야의 영역도 넓히고, 자신만의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갖고 있다. 마리는 프리랜서로 전향하면서 회사에서 받던 월급의 70%만 벌 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거보다 훨씬 많이 버는 달도 있고 그렇지 못한 달도 있다. 얼추 평균해서 기대했던 만큼은 벌고 있다. 마리는 회사를 나오기 전 잘못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기대했던 수익을 벌 수만 있다면 직장인보다 프리랜서가 마음만큼은 자유로울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프리랜서가 되고 보니 막연한 불안함이 항상 마음 한 켠을 짓누르고 있다. 물론 물리적으로 자유로운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이게 과연 진정한 자유로움인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세상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예측할 수 없는 이유로 일이 끊길 수도 있다. 마리의 불안은 부정적인 상상력을 계속 자극한다.
‘언젠가 인공지능이 번역을 도맡아 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훨씬 더 방대하고 깊이 있는 과학 지식을 갖게 될 것임은 확실하다. 단어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고. 더 많이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르는 단어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과학서적을 더 잘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데.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런 날은 반드시 올 텐데 큰 일이네. 회사를 나오기 전에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그때는 회사 다니기가 싫어서 프리랜서의 좋은 면만 봤을 거다. 그렇다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는 싫다. 그런 날을 대비해 내 글을 써야만 해. 그런데 사람들이 과연 내 글을 좋아할까? 그만 생각하자. 오늘의 운세가 안 좋아서 그런가 자꾸 부정적인 생각만 떠오르네.’
마리는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신다. 그래도 커피를 마시니 안 좋았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듯 하다.
‘과학서적 번역,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이것도 다 인간적인 감성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좋게 생각하자.’
마리는 사업하는 친구 미지 사무실에서 글 쓰는 작업을 한다. 미지는 고등학교 친구이다. 마리는 회사를 처음 나왔을 때 카페를 돌아다니면서 일했다. 처음에는 자유롭게 일하는 느낌을 줘 카페가 업무 장소로 나쁘지 않았지만, 날이 거듭 될수록 자신만의 업무 공간이 없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마리가 이런 생각을 할 즈음 미지의 회사는 사업이 잘 되면서 강남에 있는 넓고 좋은 사무실로 이사를 하게 됐다. 마리가 카페를 전전하면서 일하는 것을 알고 있던 미지는 마리에게 새로 이사한 사무실에 여유 공간이 있으니, 책상 하나를 쓰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런 제안을 해준 미지가 너무 고마웠다. 미지는 괜찮다고 했지만, 매달 임대료 명목으로 미지 회사에 11만원을 내고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 미지덕분에 적은 비용으로 좋은 사무실을 쓰게 됐다. 복사기, 프린터, 팩스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너무 편하다. 무엇보다 사무실이 집이랑도 가깝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미지는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하지 않고 쥬얼리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하고 몇 년 동안은 미지가 너무 바빠서 만나지도 못했다. 미지의 사업은 처음 2, 3년 동안은 매우 힘들었고 3년 전부터 사업이 잘 되기 시작했다. 매출은 매년 크게 증가하고 있고, 시작할 때 한 명이던 직원이 지금은 스무 명으로 늘었다. 미지의 사업이 이렇게 잘 되기까지는 아버지의 힘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사업 초기 투자금에다 사업이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다. 아버지의 지원만으로 미지가 지금의 성과를 이룬 것은 절대 아니다. 미지는 편한 길을 갈 수도 있었다. 미지 아버지는 큰 사업체를 운영한다. 대학 졸업 후 취직해서 사회 생활을 하다 적당한 시기에 아버지 회사에서 일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처음부터 아버지 회사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지는 자기 사업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다. 미지는 쥬얼리 사업에 대한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고 성실함에 있어서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미지를 보면 어떻게 저렇게까지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지 감탄이 나올 때가 많다. 마리는 자신의 힘으로 이렇게 사업을 잘 일궈나가는 미지를 보면 항상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집도 부자고 본인 스스로도 돈을 많이 버는 미지가 부럽기도 하다.
마리가 시간을 확인한다. 10시 37분이다. 미지는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미지는 2주 전 유럽 출장을 떠났다 어제 귀국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좀처럼 늦지 않는 미지인데 마리는 미지가 왜 늦는지 궁금하다. 미지에게 톡을 보내려고 할 때 미지가 출근한다.
출입문으로 들어오는 미지를 보고 여기저기서 직원들이 인사를 한다. “대표팀, 안녕하세요?’, “출장 잘 다녀오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미지가 아주 환한 표정으로 직원들의 안부를 묻는다. “다들 잘 있었어? 별일 없었지?”
“네. 별일 없었습니다.”
“윤대리, 점심 먹고 1시 30분에 전체 회의할 수 있게 준비해.”
“대표님, 3시에 하면 안 될까요? 출장 자료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요.” 윤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네. 이슈가 많아서 시간이 좀 걸리겠네. 그럼 3시로 하고 늦어질 거 같으면 미리 얘기해 줘.”
미지가 고개를 돌려 마리를 쳐다 본다. 미지와 눈이 마주친 마리는 반갑게 손을 흔든다. 미지도 손을 흔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리도 미지를 따라 들어간다.
“미지야, 출장 잘 다녀왔어?”
“응. 잘 다녀왔어.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피곤해 보이는데, 어제 잠은 잘 잤어?”
“아니. 거의 한 숨도 못 잤어.
“왜 못 잤어?”
“너무 피곤해서 잠이 잘 안 올 때가 있잖아. 어제가 그랬어. 어떤 건지 알지?”
“응. 나도 알아. 피곤은 한데 잠은 안 오고 말똥말똥한 거. 그냥 오늘 하루 쉬지 그랬어?”
“힘들어서 쉴까도 생각했는데 사무실을 2주나 비웠잖아. 마음 편하게 못 쉴 거 같아서 그냥 나왔어.”
“하루 쉰다고 회사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럽에 놀러 간 게 아니라 일하러 갔다 왔는데 하루 정도 쉬어도 돼. 회사 잘 돌아가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마음이 안 놓이는 거야? 아무튼 잘 나가는 애가 더 앓는 소리한다니까.”
“야! 잘 나가기는 뭐가 잘 나가! 이제 조금 잘 되기 시작하는 거야. 사업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아빠한테 빌린 돈도 갚아야 하고 은행 대출도 많단 말이야. 지금 하는 걸로는 많이 부족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돼야 해.”
“하여간 욕심은 많아가지고 앞으로 더 잘 되겠지. 내가 어릴 때부터 널 봐왔잖아. 넌 그야말로 성실의 아이콘이라고. 지금 보다 더 잘 될 거니까 걱정 말고 마음 편하게 먹어.”
“하하. 고마워. 그런데 마리야, 너 너무 기계적으로 좋은 말 해주는 거 아니냐?”
“야, 너는 왜 좋은 얘기 해줘도 지랄이야? 기계적으로 하는 말 아니거든.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너는 너무 의심이 많아.” 미지 말에 마리가 발끈했다.
“마리야, 농담이야. 발끈하기는.. 어쨌든 아빠한테 빌린 돈은 빨리 갚아버리고 싶어. 나 졸업하자마자 사업한다고 아빠가 투자했을 때 새엄마가 엄청 반대했었어.” 미지는 말을 하려다 잠시 멈칫한다.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지금에 만족 할 수 없는 상황이야. 네가 몰라서 그래.”
“그래 알았어. 그나저나 유럽 출장 갔던 일은 잘 됐어? 부럽다 나도 유럽 가고 싶다.”
“그러게 시간 내서 우리 같이 유럽여행 가자.”
“완전 좋아. 너무 재미있겠다.”
“아무튼 출장은 잘 된 일도 있었고 심각한 문제도 있었어. 다행히 괜찮은 세공 업체 몇 군데를 알게 됐고 기존 제품은 생산 단가를 조금 더 낮출 수 있는 방안을 찾았어. 그런데 지금 문제가 두 달 후에 출시해야 할 신규 모델이 우리가 줬던 디자인대로 샘플이 안 나왔어. 그동안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어서 믿고 맡겼는데 사고가 터지네. 아! 진짜 어찌나 짜증나고 열 받던지. 다시 가공, 세공 해서 샘플 만들고 우리가 그걸 다시 확인 후 생산까지 하려면 아무래도 출시 예정일을 못 맞출 거 같아. 홍보랑 마케팅 일정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 틀어지게 생겼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 두 달이나 남았는데 그 일정 맞추기가 어려운 거야?”
“응. 쉽지 않을 거 같아. 신규 모델 출시는 일정을 다 다시 짜야 할거 같아. 휴~ 머리 아프다. 일도 이렇게 꼬이는 상황에서 같이 출장 간 윤대리 일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
“윤대리 일 잘 한다고 하지 않았나?”
“잘 할 때도 있고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었지.”
“항상 마음에 들 수는 없겠지. 세상에 대표가 원하는 만큼 일 잘 하는 직원이 얼마나 되겠어? 그런 거까지 감안하면서 같이 일해야지. 너무 스트레스 받지마.”
“네 말이 맞아. 그런데 일이 잘 안 풀리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너무 짜증나더라고. 나는 애가 타는데 걔는 아주 신났더라고. 여행 온 줄 알아.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진짜 출장가있는 2주동안 잠을 제대로 잔 날이 없어. 샘플이 디자인대로 안 나온 날은 일 다 마치고 호텔에서 자려고 누웠는데 얼굴에 아주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드는 거야. 너무 놀라서 손으로 벌레 떨어지라고 얼굴을 막 쳐냈어. 그랬더니 괜찮더라고. 그리고 나서 다시 자려고 누웠는데 또 얼굴에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드는 거야. 이번에는 불을 켜고 거울로 얼굴을 봤더니 벌레가 안 보이더라고. 아주 작은 벌레 같아서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봤는데도 안 보이더라. 그래서 ‘뭐지?’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불 끄고 누웠는데 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길래 이번에는 화장실로 달려가 세수를 했어. 비누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 가면서 세수를 했어. 그리고 다시 자려고 누웠는데 또 그러는 거야. 얼굴에 아주 작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 아주 미치겠더라고.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다시 화장실로 가서 세수하고 거울 보고를 반복했어. 아무리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봐도 벌레는 없는 거야. 그러다 어느 순간 ‘아, 실제로 벌레가 있는 게 아니구나.’하고 깨달았어. 그날 밤은 완전 꼴딱 샜어. 정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거기다가 윤대리까지 속 썩이니까 얘를 한국 돌아가자 마자 잘라야겠다는 생각마저 들더라고.”
마리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출장 가서 정말 힘들었구나. 거의 신경쇠약이었네. 벌레 얘기는 충격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증상까지. 신규 모델은 정 안되면 출시를 좀 미뤄야지 어쩌겠어. 미지야, 너무 스트레스 받지마. 너 진짜 잘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윤대리는 우리랑 동갑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 미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가 워낙 사업을 일찍 시작해서 그렇지 윤대리 아직 경력이 짧다고 볼 수 있잖아. 그리고 윤대리 처음으로 해외출장 가는 거였는데 어떻게 보면 설레는 게 당연하지. 다른데도 아니고 유럽으로 갔는데 말이야. 이해 못할 것도 아니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일이 잘 안 풀리는 상황에서 윤대리가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하니까 윤대리가 더 안 좋게 보였을 거야.”
“뭐.. 네 말대로 일이 꼬이면서 윤대리한테 더 화가 난 것도 있지. 그때는 정말 화가 너무 많이 나서 나도 내가 아니었어. 그래도 너랑 얘기하고 나니까 좀 기분이 풀리네. 마리야, 우리 점심 일찍 먹으러 갈까? 나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오랜만에 둘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좋아. 나도 오늘 아침 안 먹어서 배고파.” 마리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마리는 미지랑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 책상에 앉았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지 할 일은 많은데 졸음이 몰려 온다. 오전은 미지와 수다 떨면서 시간을 다 보냈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서적 1차 번역본을 두 달 후에 출판사에 넘겨야 한다. 남은 분량을 감안하면 시간적인 여유가 있긴 하다. 그렇다고 그걸 믿고 게을리할 수는 없다. 마음의 여유는 항상 마감에 쫓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감에 쫓겼을 때 더 큰 문제는 번역 품질이 떨어진다는 거다. 그런데 졸음이 계속 쏟아진다. 의지만으로는 졸음을 몰아내기가 힘들다. 마리는 탕비실에 가서 믹스 커피 한 잔을 타서 왔다. 달고 쌉싸래한 커피를 마시니 졸음이 사라지고 각성이 되는 듯 하다. 2시간 정도 일에 집중했다. 그런데 다시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마리는 이번에도 탕비실로 가서 믹스 커피 한 잔을 타서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를 마시며 2시간 동안 번역한 내용을 천천히 살펴본다. 문장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 적절한 단어를 찾아야 하고 문장은 조금 더 간결하고 명확해야 한다. 아무리 읽어봐도 원문의 의도를 잘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남은 커피를 한 입에 다 마셔버리고 일에 집중하려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집중이 안 된다.
‘도대체 2시간 동안 뭘 한 거야? 아침부터 아무것도 한 게 없네.’
마리는 건물 10층에 있는 정원에 가서 잠시 머리를 식히기로 한다. 우선 1층으로 내려가서 테이크아웃 전문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다.
‘오늘 왜 이렇게 자꾸 커피가 당기는 거야? 도대체 몇 잔을 마시는지 모르겠네.’
10층에 도착하여 정원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밝은 빛이 마리에게로 마구 쏟아지면서 심하게 눈이 부신다. 눈은 금새 밝은 빛에 적응했다. 정원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별로 없다. 다들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만 하고 있나 보다. 마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 햇빛도 쐬고 신선한 공기도 마시니 답답한 속도 뚫리고 머리도 맑아진 느낌이다. 정원에 나오자마자 이렇게 기분 전환이 되다니 진작에 나와 바깥 바람을 쐴 걸 그랬다. 마리는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셨다. 진한 커피 향으로 입안이 가득 채워진다. 마리는 다시 하늘을 본다. 맑은 하늘에 구름 하나가 떠 있고 그 주위로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저 새들은 보이는 것처럼 정말 자유로울까? 그렇다면 나도 새가 되어 날아보고 싶다. 아니다. 새들의 자유도 불완전 할 거야. 아닌가? 그래도 땅에 붙어 있는 나보다는 나으려나?’
마리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난간 쪽으로 걸어간다. 정원의 난간은 폭이 매우 넓고 높이는 마리의 명치 정도까지 된다. 커피가 담긴 컵과 스마트폰을 난간 위에 놓고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평일 오후여서 그런지 거리에 사람들이 많다. 다들 바쁘게 어디론가로 가고 있다.
‘다들 어딜 저렇게 가나?’
긴 머리가 가볍게 날릴 정도의 바람이 분다. 시원하다. 바람은 피부에 닿는 햇살의 따뜻함을 잠시 사라지게 한다. 바람이 멈추면 다시 따뜻해진다. 마리는 오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또 마셨다. 이 때 마음에 안 드는 번역 문구를 수정 할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올랐다. 사무실에서는 아무리 고민을 하고 머리를 쥐어짜내 보려 해도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를 빨리 해야겠다고 생각한 마리는 난간에 놓여있던 스마트폰을 들었다. 스마트폰 하단에서 펜을 꺼냈다. 그런데 급한 마음에 서둘러서 꺼내다 손에서 펜을 놓쳤다. 펜은 난간에 떨어져 한 번 튀어올라 한 바퀴를 돈 후 건물 아래로 떨어졌다. 마리는 밖으로 튀어나간 펜을 잡아 보려 했으나 손은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재빨리 아래를 봤다. 펜은 빙글빙글 돌면서 빠르게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어떤 남자 머리 위로 떨어진다. 워낙 가벼운 물건이라 사람이 다칠 염려도 없고, 펜도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펜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에 마리는 바로 정원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고 보니 엘리베이터가 37층에 있다. 10층까지 내려오는 동안 두 번 정도 멈출걸 감안하면 계단으로 가는 것이 훨씬 빠를 것 같다. 마리는 비상구 계단으로 가서 1층까지 뛰어내려 갔다. 비상구를 빠르게 빠져 나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펜이 떨어진 곳으로 생각되는 부근을 꼼꼼하게 살펴본다. 어디에도 펜은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 튀어 멀리 날아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큰 반경으로도 찾아 본다. 여전히 찾을 수가 없다. 있을만한 곳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주워갔나 보다. 마리는 늘 스마트폰 펜으로 메모를 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무언가 생각나면 반사적으로 스마트폰 하단을 눌러 펜을 꺼내는 습관 있다.
‘진짜 짜증나네. 도대체 어떤 미친 새끼가 스마트폰 펜을 주워 간 거야? 스마트폰 펜 찾으려고 cctv를 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리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 봤다.
‘없네, 없어. 다시 사면 되지 뭐.. 비싸지도 않은데.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
급하게 내려오느라 정원에 스마트폰을 두고 왔다. 다시 정원으로 올라가니 난간 위에 아메리카노와 스마트폰이 그대로 놓여있다.

*오늘의 운세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보세요. 모여있는 사람들 속에서 운명적 귀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마리는 출근하자마자 미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미지야, 굿모닝! 오늘 왠 일로 일찍 출근했어?”
“뭔 소리하는 거야? 나 원래 일찍 출근해. 너야말로 오늘 일찍 왔다. 어제 푹 자고 일찍 일어났나 봐?”
“푹 자기는.. 나 어제 한 숨도 못 잤어.”
“왜?”
“모르겠어. 요새 갑자기 불면증이 생겼어. 진짜 밤에 잠 안 오면 너무 괴롭더라. 너도 여전히 불면증 심해? 출장 가서는 잘 때 얼굴에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까지 들었었잖아.”
“벌레 기어 다니는 느낌은 그 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멘탈이 완전히 나가서 그랬던 거 같고. 가끔 잠이 잘 안 올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불면증이 많이 좋아 졌어.”
“정말? 다행이다. 잠 잘 자는 비법 좀 알려줘. 나 정말 힘들어.”
“딱히 비법이 있는 건 아니고. 남자친구랑 같이 살면서부터 불면증이 좋아졌어. 그런데 이게 말이지, 집에서 나와서 좋아진 건지 아니면 남자친구랑 같이 자니까 좋아진 건지는 잘 모르겠어.”
“그렇구나. 뭐.. 남자 친구랑 같이 있으니까 좋아졌겠지. 나도 연애를 하면 좀 좋아지려나?”
“그럴 수도 있지. 너도 연애할 때가 됐어. 남자 안 만나지 꽤 됐잖아. 내 남자친구한테 너 소개해줄 만한 사람 알아보라고 해야겠다.”
마리가 웃으면서 말한다. “고마워. 정말 너 밖에 없다. 내가 성공하면 너한테 신세진 거 다 갚을 게.”
“신세? 뭔 소리하는 거야? 소개팅 해주는 게 무슨 신세야?”
“소개팅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좋은 사무실 쓰게 해주는 것만해도 신세지는 거지. 그것도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또 항상 나한테 잘 해주잖아. 나는 너한테 해주는 것도 없는데.”
“난 또 뭔 얘기한다고. 내가 너한테 이 정도도 못 해주겠어? 그리고 매달 사무실 쓰는 돈 입금 안 해도 돼. 그냥 써.”
“어떻게 그래? 얼마 안되지만 그런 건 확실히 해야지. 우리 관계가 오래 가려면 돈 문제만큼은 확실히 해야 해. 그런데 미지야, 나 오늘의 운세가 뭔 줄 알아?”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웬 오늘의 운세? 뭔데?”
마리는 미지에게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운세를 보여주면서 말한다. “네가 소개팅 얘기하니까 갑자기 생각이 났어. 글쎄 오늘의 운세가 귀인을 만난대. 운명적 귀인. 그래서 오늘 기분이 괜찮아.”
“그런데 너 이런 운세를 믿어?”
“믿는다기 보다 좋은 말 나오면 좋잖아. 재미 삼아 보는 거야.”
“너 화학 전공이잖아. 과학 전공한 사람도 이런 걸 믿는 구나. 네가 이런 거에 관심이 있는 줄 몰랐네. 하기야 인간은 누구나 불안한 존재니까.”
“그냥 재미로 본다니까 무슨 또 불안한 존재까지 나와. 너 왜 이렇게 진지하냐?”
“볼 거면 유명한데 가서 제대로 봐야지. 오늘의 운세처럼 한두 줄 나오는 걸 어떻게 믿어?”
“아 진짜, 그냥 재미로 보는 거라고. 간만에 좋은 운세 나왔는데 왜 초 치려는 거야?”
“초 치려는 게 아니라. 오늘의 운세는 너무 간단하잖아. 나 같으면 제대로 보러 가겠다고.”
“뭐.. 굳이 점까지 보러 갈 마음이 있는 건 아니고.”
“그래 알았어. 갈 마음이 없다면 굳이 볼 필요 없지. 네가 오늘의 운세 보고 기분 좋다고 하길래 말해 봤어. 그리고 마리야, 나 오늘은 점심 약속이 있어서 조금 이따 나갈 거야.”
“그렇구나. 그럼 나는 윤대리랑 먹을게.”
“내일은 같이 점심 먹자. 너 윤대리랑 내 욕하면 죽어.” 미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마리가 미지의 방을 나가면서 말한다. “왜 네 욕할까 봐 겁나? 아주 내가 잘근잘근 씹어주겠어. 하하. 점심 맛있게 먹어.”
“아! 맞다. 마리야 잠깐만.”
“응?” 문을 열고 나가는 마리가 다시 들어왔다.
미지가 예쁘게 포장이 된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넨다. “이번에 나온 새로운 모델이야. 발찌인데, 지금 한 번 해봐. 잘 어울리는지 한 번 보자.”
“나 주는 거야? 와우! 땡큐.” 마리는 얼른 포장을 뜯었고 발찌를 발목에 착용했다.
두껍지도 그렇다고 아주 가늘지도 않은 심플한 디자인의 은색 발찌다. 마리는 발찌를 처음 차본다. 발찌를 하고 몇 발자국 걸어 보았다.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 걸을 때마다 발목에서 조금씩 흔들리는 발찌의 느낌이 낯설다. 이 낯섦은 어색함 보다는 새로움의 낯섦이다.
“와! 너무 예쁘다. 너한테 잘 어울리네. 너는 키가 커서 그런지 발목도 길어 보여. 발목이 적당히 가늘면서 길어 보이니까 더 잘 어울리네.” 미지가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게 너무 예쁘다. 색도 그렇고 디자인도 화려하지 않으면서 굉장히 세련됐네. 너무 마음에 들어.”
“너한테 잘 어울리니까 나도 기분 좋다.”
“미지야, 고마워. 그럼 점심 약속 잘 다녀 오고.” 마리는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미지의 방에서 나왔다.

윤대리와 점심을 먹고 온 마리는 열심히 일하고 있다. 운세도 좋았고 선물까지 받아서 그런지 오늘은 유난히 집중이 잘 된다. 번역하는 속도도 다른 날보다 빠르다. 오늘따라 번역한 문장은 다시 봐도 크게 손댈 거 없이 매끄럽고, 많은 고민을 하면서 선택했던 단어는 하나 하나가 다 마음에 든다. 오늘은 막힘이 없는 날이다. 이런 날은 좋은 흐름이 끊기지 않게 퇴근할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 한참 집중해서 일하는 중에 스마트폰 벨이 울린다. 너무 몰입한 나마지 갑자기 울리는 벨 소리에 마리는 화들짝 놀랐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지금 번역하고 있는 서적의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 최소희 대리이다.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했는데 왜 또 전화하는 거야?’
몰입을 방해하는 최대리의 전화가 짜증난다.
“최대리님, 안녕하세요?” 마리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지난주에 통화했는데 오랜만은 아니죠.”
최대리는 마리의 말에 멋쩍게 웃는다. “하하. 그러네요. 지난주에 통화했었네요. 작가님 지금 어디세요?”
“저는 지금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마침 잘 됐네요. 제가 외근 나와서 막 일을 마쳤거든요. 지금 역삼동인데 작가님 사무실이 이 근처라고 들어서요. 혹시 작가님 시간 되면 잠깐 뵈려고요. 일 때문은 아니고요. 근처 온 김에 작가님이랑 차 한잔 마시고 싶어서 그러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편집자가 근처에 왔다는데 거절하기가 힘들다. “네 괜찮아요. 마침 쉬려던 참이었는데 잘 됐네요. 사무실 근처에 카페 데우스라고 있거든요. 거기서 봐요. 검색하면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작가님, 저 거기 알아요. 그럼 거기서 뵐게요. 저는 10분 정도면 도착할 거 같고요. 작가님은 하던 일 마무리하고 천천히 오세요.”
마리는 번역하던 문단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최대리한테 톡이 왔다.
『작가님, 저는 도착했습니다. 뭐 드실래요? 출발하실 때 연락 주시면 주문할게요. ^^』
『저 지금 출발해요. 제가 살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아니에요. 제가 약속도 없이 뵙자고 한 건데 제가 사야죠. 작가님 좋아하시는 아메리카노 주문할까요?』
『네 그럼. 저는 에스프레소로 할게요. 투샷으로 부탁 드려요. ^^』
『네 작가님 천천히 오세요.』
‘설마 귀인이 최대리는 아니겠지?’하는 생각을 하며 카페 데우스로 갔다.
최대리는 카페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있다. 마리는 최대리 맞은 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에스프레소 한 잔과 최대리가 마시는 아메리카노가 놓여있다.
“최대리님, 오랜만이에요. 통화는 자주했어도 직접 본지는 꽤 된 거 같네요.”
최대리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한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뵙자고 한 건 아닌지..”
“아니에요. 전화로 얘기한 거처럼 저도 마침 쉬려고 했어요.” 마리는 억지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최대리가 밝게 웃는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요. 일하시는데 방해한 건 아닐지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작가님도 이 카페 아시네요? 저 여기 좋아하거든요. 뭔가 분위기가 아늑하고 좋아요.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저만 알고 있는 좋은 곳. 왜 그런데 있잖아요. 카페 데우스가 저한테는 바로 그런 곳이거든요.”
“저야 이 근처에서 일하니까 알게 됐죠. 저도 여기 좋아해서 종종 와요. 최대리님 말처럼 나만 알고 싶은 좋은 카페. 딱 그런 장소에요. 그런데 이 근처에 어쩐 일이에요?”
“혹시 유성훈 작가님 아세요? SF 소설 쓰는 작가님이신데.”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아직 그 분 작품은 한 편도 못 봤어요.”
“아, 아시는 구나. 이 근처에서 유성훈 작가님이랑 미팅이 있었거든요. 그 분이랑 미팅하는데 작가님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갑자기 연락 드렸어요. 마침 이 근처에 사무실이 있다고 전에 들었던 게 기억도 났고요.”
마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유성훈 작가님이랑 미팅하는데, 제 생각이 났다고요? 왜 생각났는지 궁금하네요.”
“미팅 중에 작가님 생각이 번뜩 떠올랐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전에도 한 번 말씀 드렸는데 제가 작가님 문체를 좋아하거든요.”
마리가 눈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럼요. 당연히 기억하죠.”
“저는 작가님의 수사를 최대한 자제하는 담백하면서 담담한 문체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문장이 필요한 순간에만 꾸며져 있어요. 그렇다 보니 글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어요. 간결하면서 전달력이 강한 것도 마음에 들고요. 작가님 문장은 불필요한 아름다움이 없어서 좋아요. 그러면서도 원작 작가의 의도가 한 문장, 한 문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죠. 그리고 작가님의 글은 어떨 때 담백하면서도 시적일 때가 있어요. 과학서적에서 시적인 순간을 만나는 건 매우 어려운데, 작가님 글에서는 마주할 때가 있단 말이죠. 그래서 작가님 글을 더 좋아해요.”
“최대리님, 좋게 봐줘서 너무 고마운데 너무 과찬이에요.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과학서적이다 보니까 문체가 수사는 적고 간결하고 담백할 수 밖에 없죠. 제가 글을 잘 썼다기 보다는 원작 작가님들이 잘 쓴 거죠.”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번역에도 번역 작가만의 개성이 다 드러나요. 원문 대조, 교정, 교열을 하다 보면 그런 게 많이 느껴져요.”
“당연히 그런 면도 있겠죠. 최대리님이 좋게 얘기해주니까 기분은 좋네요.”
“좋게 얘기해주는 게 아니라 그냥 제 생각을 말하는 거에요. 어쨌든 작가님 글을 좋아하다 보니 작가님이 번역하신 거 교정, 교열할 때가 가장 재미있고 신나요.”
“계속 칭찬만 해주니까 쑥스럽네요. 그나저나..” 마리가 말하는 중에 카페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그 남자에게 눈길이 간다. 마리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 남자를 흘끗 쳐다본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다. 푸른색 셔츠에 베이지색 치노팬츠를 입었고 밝은 갈색 로퍼를 신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스타일에 고급스러운 로퍼가 세련미를 더해준다. 날렵하게 주름이 잡힌 베이지색 치노팬츠, 고급스러운 갈색 로퍼, 그 사이로 살짝 드러난 발목이 잘 어울린다. 그 남자는 카페 안으로 들어와 마리와 최대리가 앉은 반대편 끝 유리창을 향해 앉아 있는 남자의 맞은 편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바지 기장이 위로 당겨지면서 굵은 발목이 더 길게 드러났다. 마리는 에스프레소를 한 번에 다 마셨다. 에스프레소의 쓰디쓴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진한 향이 온 몸에 퍼진다.
“작가님, 아시는 분 있으세요?” 최대리는 마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네? 아.. 아니에요. 갑자기 딴 생각을 했어요. 아까 번역할 때 고민했던 거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갑자기 떠올라서요.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얼마나 고민이 많으셨으면.. 작가님 문체가 마음에 들어서 작가님이랑 작업하는 게 신난다고 하니까, 작가님이 쑥스럽다고 하면서 무언가를 얘기하려고 하셨어요.”
“아 맞다. 하하. 유성훈 작가님 만나면서 왜 제 생각이 났는지 물으려고 했는데.. 순간 딴 생각을 했네요.”
“아, 그랬군요. 저도 그 얘기를 한다는 게 그만.. 하하.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작가님도 SF소설을 써 보면 어떤가 해서요.”
“SF소설요? 소설을 써 볼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는데요.”
“저번에 얘기하셨잖아요. 번역 말고 작가님 자신의 글도 언젠가 써보고 싶다고요.”
“네. 그렇긴 한데 에세이를 생각했지, 소설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유성훈 작가님이랑 미팅을 하면서 작가님의 개성이 담긴 문체로 쓰여진 SF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님은 이공계 쪽이고 과학서적 전문 번역가니까,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지 않을 까요? 편집자로서의 직감인데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올 거 같아요. 작가님이 쓰면 작품에 전반적으로 냉엄한 기류가 흐르다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시적인 황홀함을 마주하는 SF소설이 나올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꼭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정말 작가님 팬으로서 너무너무 읽어 보고 싶어요.”
“정말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의견 줘서 너무 고마워요. 깊이 고민해 볼게요.”
“사실 오늘 갑자기 작가님을 뵙자고 한 건 이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거에요. 만약 정말로 쓰신다면 제가 꼭 편집자로 함께 작업에 참여하고 싶어요.
“하하. 그럼요. 당연하죠. 만약에 쓰게 되면 최대리님이랑 꼭 할게요.”
“작가님, 저는 회사에 복귀해야 해서요. 이만 일어날까요?”
“그래요. 일어나죠. 저도 사무실로 들어가봐야 해요.” 마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집중을 끊어 짜증났던 자리가 기분 좋게 마무리가 됐다. 마리와 최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마리는 나가면서 그 남자를 흘끗 쳐다 봤다. 그 남자도 곁눈질로 마리를 본다. 두 사람은 잠시 눈이 마주쳤다. 마리와 최대리는 밖으로 나갔고 가는 길이 반대 방향인 두 사람은 출입문 앞에서 바로 헤어졌다. 마리는 카페 유리창을 등지고 앉아있는 그 남자 뒤로 걸어간다. 고개를 돌려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본다. 그런데 그 남자와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이 낯이 익다. 초등학교 동창이다. 카페 안에서는 멀리 뒷모습만 보여서 알아 보지 못했다. 반가운 마음에 마리는 다시 카페 데우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남자와 마주 앉아 있는 사람 뒤로 갔다.
마리는 반가운 목소리로 친구 이름을 부른다. “종수야!”
종수가 뒤돌아 봤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 마리야! 도대체 이게 얼마만이야?”
“그러게 우리 엄청 오랜만이다. 적어도 5년은 된 거 같은데?”
“맞아. 최소한 그 정도는 된 거 같아. 회사가 이 근처야?”
“나 회사 그만뒀어. 지금은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고 있어. 사무실이 이 근처에 있어.”
“프리랜서 번역가? 회사 그만뒀는지 몰랐네. 번역가 멋지다. 프리랜서로 일하다니 너무 부러운데?”
“부럽기는..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힘들어 죽겠어. 너도 사무실이 이 근처야?”
“아니. 사무실은 잠실에 있어. 외근 나왔다가 이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 만나고 있는 중이야. 서로 인사해. 이 친구는 정요셉. 요셉아. 얘는 내 초등학교 친구 이마리.”
“아 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종수야.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퇴근하고 저녁 같이 먹을래?”
“나야 좋지. 나 사무실에 들어가봐야 해서. 사무실 갔다 퇴근하고 이리로 다시 올게. 7시 좀 넘을 거 같은데 괜찮아?”
“응. 나야 괜찮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와도 돼. 나는 일하고 있으면 되니까.”
“그래. 그럼 여유 있게 7시 30분에 볼까?”
“7시 30분 좋아. 그나저나 진짜 반갑다.”
“그러게. 어떻게 여기서 널 만나냐? 요셉아, 약속 없으면 너도 오늘 같이 저녁 먹자. 술도 한 잔 하고 어때?”
“나? 아니야. 나는 괜찮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둘이서 먹어야지. 내가 낄 자리가 아닌..”
마리는 요셉의 말을 끊는다. “괜찮아요. 같이 먹어요. 혹시 약속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래 약속 없으면 같이 먹자. 마리랑 둘이 먹는 거 알면 와이프가 싫어할거야. 네가 있어야만 해.”
마리가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너 결혼 했어? 엄청 빨리 했네.”
“응. 어쩌다 보니 빨리 하게 됐어. 연애할 때가 좋지 결혼하니까 엄청 피곤해. 친구인 너랑 술 먹는 것도 눈치 봐야 하고 말이지.”
“하하. 그렇구나. 너를 많이 좋아하니까 그렇겠지.”
“야, 많이 좋아하기는 개뿔.. 그냥 의심하는 거지.”
“결혼식에 왜 나 안 불렀어?”
“한 동안 연락 안 했는데 결혼 한다고 갑자기 어떻게 연락하냐? 연락하기가 좀 그렇더라고.”
마리가 종수의 어깨를 치며 말한다. “야, 뭐 어때? 다 그런 거지.” 마리는 고개를 돌려 요셉을 보며 웃는다. “같이 저녁 먹어요. 얘가 와이프 눈치 보느라 저랑 단 둘이 저녁 못 먹겠다고 하잖아요.”
“아.. 네 그럼 같이 먹죠.” 요셉이 마지못한 척하며 대답했다.

그날 마리, 요셉, 종수는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마리와 요셉은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금새 가까워졌다. 특히 대화가 잘 통했다. 술자리를 마치고 마리는 집으로 돌아와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던 요셉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때 요셉에게서 톡이 왔다. 잘 들어갔는지 묻는 내용이다. 마리는 내용을 확인하고 바로 답을 보냈다. 오늘의 운세가 이렇게까지 잘 맞은 건 처음이다. 잠이 몰려온다. 마리는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순간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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