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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즈 Oct 14. 2024

암밍아웃 ; 나 암 이래

숨을 곳이 없다. 티셔츠를 끌어내려 가려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어쩌다 하의를 안 입고 나온 것인지 수치스러워 죽을 것만 같다. 하체가 맨몸인 것을 자각한 시점은 버스 안에서다. 선생님들과 1박 2일 워크숍에 갔다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혼자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 보려 버둥거렸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버스에서는 앉아있는 자세라 그나마 나았다. 더 큰 문제는 버스에서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학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맨 몸뚱이가 감출 수 없이 드러나버렸다. 심지어 학생들도 있었다. 수치스러움이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여실히 느끼며 내 차로 뛰어 들어갔다. 분명 차 안으로 들어왔는데 내 차를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차 안에서도 맨몸을 가릴 수 없다. 내 차가 투명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다 보였다. 난 하체를 가리느라 어쩔 줄 몰라한다. 빨리 학교를 나가고 싶은데, 몸을 가리기 위해 손을 쓰다 보니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는 것도 힘들다. 죽고 싶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안된다.


꿈이었다. 꿈이 너무도 생생해 잠이 깬 뒤에도 난처함과 수치스러움이 그대로 밀려왔다.

암 진단 후 3주 됐을 때 꾼 꿈이었다. 발가벗겨져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은 내면을 보여주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발병 사실을 거의 알리지 않은 채 3주를 보냈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사람들 만나기가 두려웠다. 오랜만에 만나는 누군가가 어찌 지내냐고 일상적인 안부를 물었는데 왈칵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아서였다. 평온함으로 위장할 가면이 내겐 없었다. 하의를 입지 않은 채로 학교 주차장에 있던 꿈이 적확하게 그때의 마음 상태였다. 어둑해지기를 기다려 산책 나가며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다. 산책길에 만난 누군가가 안부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수백 번 속으로 되뇌며 걸었다.


나 암 이래

암진단 후 3주가 지날 때까지 가족들에게도 발병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대학병원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차 병원 유방외과에서 했던 조직검사 결과가 오진이길 바랐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대학병원 결과를 기다렸다. 역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병원에서도 암선고를 받았다. 최종선고였다. 이제는 더이상 미룰 수 없이 암소식을 알려야 할 때가 되었다.


“나, 암 이래"

'나, 암이야.'라고 해야 맞는 것 같은데 책에서도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의사가 내 병명이 암이라는데, 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겠어.'

이런 긴 마음을 두 단어로 전하는 듯 보인다. 나 또한 그랬다. 내 얘기를 남의 얘기인 것처럼, 어디선가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전하듯 '나, 암 이래'라고 했다.

암환자라는 것을 수용하는 것 못지않게 암 소식을 주변에 알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오죽하면 '암밍아웃'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일까.



학교에 암밍아웃

학교에 먼저 알렸다. 인사발령이 통지되면 기간제 교사 구하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대학병원 결과가 나오기 전에 먼저 알렸다. 교감선생님에게 전화해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고 행정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교감선생님, 제가 유방암이라네요. 아직 대학병원 결과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휴직해야 할 것 같아요. 1년 기간제 뽑으시라고 전화드렸어요."


너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나 보다. 교감선생님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신다.


"결과 기다리고 있다고요? 별 일 아닐 겁니다. 그리고 부장님은 씩씩하니까 금방 나으실 거예요."


눈물을 쏟지 않고 통화했다는 것은 성공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의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이야기했더니 상대방도 별 일 아닌 것처럼 대하니, 서운한 마음이 든다. 교감선생님과 나눈 대화 어디에도 서운함이 느껴질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서운함이라는 감정이 툭 튀어나온 건지 나조차도 내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감정 컨트롤하기 너무 힘들다.



설날에 암밍아웃

가족들에게 암소식을 알리는 D-day는 설 명절로 정했다. 전화로 이야기했다가는 평소 오버스러운 가족들이 난리 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마음먹었다. 가족에게 암밍아웃은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뭐라고 할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났다. 부모님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더더더 힘들 것 같다. 이럴 땐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 다행인건가? 딸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설 전전날, 산자락에 위치한 펜션으로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술을 좋아하는 가족들은 모여서 낄낄 깔깔 신나서 장난치며 웃는다. 나도 같이 웃으면서도 어느 틈에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계속 눈치를 살핀다. 이 분위기에 말을 꺼냈다가 명절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게 될까 봐 걱정이다.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동생 차를 타고 가는 길, 지금 말할까?

휴게소에서 올케와 둘이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게 됐는데, 지금 말할까?

저녁 식사하러 모였을 때, 지금 말할까?


그러다 드디어 때가 왔다. 점심 먹고 나선 산책길에서 걸음걸이에 따라 몇 명씩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이 틈을 타 작은 올케에게 다가갔다. 4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은 작은 올케에게 암 소식을 먼저 털어놓았다. 우린 경험자로서 알 수 있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그런 이야기를 조용조용 나눴다. 앞에 가는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올케가 암 걸렸다는 것을 친정에 이야기 못했다고 할 때의 그 기분이 뭔지 나도 알겠더라고."


"맞아요. 암에 걸린 것보다 암 사실을 알리는 게 더 큰 스트레스예요."


시간이 한참 지나도 암밍아웃은 힘들다고 했다. 암밍아웃할 때 암환자가 직접 말하는 것보다 누군가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게 좋다고 했다. 우리 가족에게 암밍아웃하는 일은 작은 올케가 대신해 주기로 했다.

그동안 난 가족들이 다 모인 상태에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그 장면을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 한 명이 암 사실을 이야기하면 가족들이 다 달라붙어 대성통곡하는 드라마 장면을 연상했던 것 같다.

작은 올케에게 털어놓으면서 명절에 마음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치워졌다. 그리고 설명절은 늘 하던 대로 즐겁게 보냈다.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을 공유한 올케는 자꾸 응원의 눈빛을 쏘아댔다. 난 그 눈빛을 피해야만 했다. 눈을 마주치면 금세 눈물이 차올라서. 헤어지는 날엔 조카에게 고모를 안아주라고 했다.


"막내야 고모 꼭 안아드려."

아홉살 조카는 억지로 안아주는 시늉을 한다.

"막내야, 고모 한 번 더 꼬옥 안아드려. 힘내시라고."

"아휴, 그만해. 됐어. 막내야 이제 됐어. 그만해도 돼..고마워."

어색함을 피하려고 과장스럽게 손을 저으며 그만하라고 했지만, 올케의 마음은 비밀스럽게 전해졌다.


이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후 피라미드 방식으로 암 소식이 전해졌다. 작은 올케가 큰 올케에게 말하고, 큰 올케가 오빠를 진정시킨 후 소식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오빠가 울면서 한 이야기를 큰올케가 전화로 전해줬다.


"엄마 아부지는 하늘에서 뭐 한대? 하늘에서 좀 지켜주시지. 차라리 내가 걸렸으면 좋겠구먼. 왜 혼자 사는 내동생이 걸려서..."


오빠는 나한테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 비슷한 티도 내지 않았다. 남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딴 이야기를 하며 씩씩하게 통화했다. 남동생들이 걱정하고 속상해서 울었다는 이야기도 올케들이 알려주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한 두 번 했어도 암밍아웃은 여전히 힘들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암 소식을 알리게 되기까지는 8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8개월쯤 지났을 때 눈물 흘리지 않은 채 '나, 유방암이야'라고 말하는 나를 보며 스스로 놀라워했다.

친구들에게 암밍아웃하러 가는 길, 만나러 간다고 한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억지로 막아둔 댐이 터진 것 같았다.

 친구들 중에서 가장 침착한 친구에게 전화로 소식을 알렸다. 그 친구가 몇몇에게 연락해서 우리 집 근처로 오겠다고 했다. 만나러 나가기 위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눈물이 났다. 어렸을 때 먼 길 떠났다 돌아오는 길 마을 어귀에서 아빠를 보고 울었던 그때처럼.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어경시대회에 나가느라 난생처음으로 1박 2일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날이었다. 해가 지고 늦었으니, 선생님 댁에서 자고 가라고 했는데 집에 너무 가고 싶었다. 집까지 1시간 넘게 걸어야 하고, 중간에 숲길을 지나야 하는데도 집에 가겠다고 했다. 겁도 많은 나는 울음을 꾹 참고 그 길을 지나, 숲을 지나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그곳에 아빠가 있었다.


그때 터진 눈물처럼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의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나를 나보다 더 많이 걱정할 사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존재에 대한 무장해제였을까?

나보다 더 많이 걱정할 친구를 알기에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다시 내 상태를 살피며 말해주었다.


"너 지금 힘들어.. 괜찮다고, 안 힘들다고 하지 마..."


난 또 내 감정을 모른척하고 있었다. 암진단 이후 한 달 정도 혼자 지내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감정의 밑바닥에 이렇게 큰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꿈이 말해준 무의식의 세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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