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은 병
사람키의 열 배쯤 돼 보이는 소나무가 뿌리가 들리운 채 넘어져 있다.
몇백 년은 살았을 조선왕릉의 소나무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산책하다 만난 그 나무 곁을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나 같았다. 뿌리 뽑혀 넘어진 모습이.
가볍디 가벼운 눈도 쌓이고 쌓이면, 나무도 쓰러뜨릴 무게를 지닐 수 있다는 것도 몰랐던 나.
내 몸에 눈은 언제부터 쌓인 걸까?
나는 왜 암에 걸렸을까?
대학병원 의사는 알겠지 하고 진료일에 물어보려고 수첩에 질문을 적어 갔다. 의사는 진료 예약 시간 40분이 지나서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진단명을 이야기했고 수술방법을 설명했다. 전공의 파업으로 진료시간이 빠듯한 의사가 서둘러 진료를 마무리하려 하자, 옷자락을 잡듯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저... 언제 암에 걸린 건가요? 원인이 뭔가요?"
"알 수 없습니다."
의사는 백 번 천 번도 넘게 들은 질문이라는 듯 심드렁하게 답했다.
대학병원 의사도 모른다고 하니, 내 삶의 궤적에서 발병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
작년에 중학교에 발령받았다. 그리고 3학년부장 보직을 맡았다.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아 비어있는 자리였다. 오랜 기간 고등학교에 근무해서 중학교 사정을 모른다고 고사했지만, 정말 할 사람이 없다는 교감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중학교의 세계는 고등학교와 많이 달랐다. 학업 스트레스에 축 늘어져있는 고등학생과 달리 중학생은 에너지가 넘쳤다. 팔팔 살아있는 중학생을 만나는 건 신선하기도 했지만, 힘에 부치기도 했다.
학년부장의 신경이 곤두서는 시간은 쉬는 시간, 점심시간이었다. 메뚜기떼처럼 몰려다니며 장난을 치는 녀석들의 놀잇감은 매일매일 달라졌다. 어떤 날은 사슴벌레, 또 어떤 날은 삭발하고 온 남학생 모자 벗기기, 다음 날은 새 신발 신고 온 녀석 운동화 밟기, 그다음 날은 화장실에서 물놀이. 날마다 달라지는 놀잇감을 보며 풋 하고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학년부장의 위엄을 최대한 끌어모아 녀석들을 엄하게 혼내고 있었지만, 눈과 입꼬리는 웃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장난을 치려나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녀석들이 밉진 않았지만, 전시상황인 것처럼 긴장하며 사는 날들이었다.
그래서인지 3학년부 선생님들은 내가 암에 걸린 것이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3학년부 단톡방에 발병 소식을 알리자, 작년의 스트레스가 컸다며 걱정하는 글이 올라왔다.
아이고 부장님…. 작년 3학년 애들이 쉽지 않긴 했죠. 그나마 서로 으쌰으쌰 해서 잘 버티긴 했어도..
작년에 부장님 덕분에 3학년부 다 같이 잘 지낼 수 있었는데…. 너무 스트레스가 크셨나 하고 마음이 좋지 않네요. 항상 저희 도와주시고 하셔서….
3학년부 선생님들에게 아니라고 작년에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는 답글을 쓰면서 생각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생각하는 스트레스의 정도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이상하다고. 암에 걸릴 정도로 힘들지 않았는데 이상하다고.
일하다 아픈 교사들
내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 주변에 암에 걸린 교사들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한 학교에 두세 명은 있다고.
한 학교에 교사가 50명이라고 하면, 50명 중 3명 암 발병률은 높은 비율 아닌가? 국가암정보센터 통계를 보면, 2021년 암 발병률은 인구 10만 명당 526.7명이라는데 말이다.
누군가 교사의 암 발병률을 조사해 줬으면 좋겠다. 교사의 절반 이상이 우울증상을 겪는다는 '2023년 교사 직무 관련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나의 질병은 산업재해, 공무상 재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피켓시위를 해야겠다는 마음까지 일었다.(이런 불뚝불뚝 치솟는 분노가 암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교사가 아프지 않은 학교
교사가 병들지 않는 학교
교사가 죽지 않는 학교
일하다 아픈 교사들
나를 병들게 한 학교
이런 피켓을 만들어 당장 교육부로 달려갈 참이었다. 암에 걸려 두문불출 칩거 중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내내 집에 틀어박혀 있어 에너지가 바닥인 상태라 실행에 옮기지 않아 다행이었다.
시위는 못하더라도,『일하다 아픈 여자들』(빨간소금, 2023) 책처럼 일하다 아픈 교사들 인터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지 칩거 중에 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열심히 해서 암에 걸렸다
발병 원인을 찾는 탐색은 계속됐다. 내가 왜 암에 걸렸는지 찾다 찾다 책까지 뒤졌다. 해답의 실마리를『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책에서 찾았다.
" 뜨거울 열에 마음 심, 마음은 곧 심장이다. 한마디로 심장이 열받도록 애를 쓴다는 말이다. 이런 심장이 열받으면 어떻게 될까? 기는 안에서 흩어지고 혈은 기를 따라 흘러 영위가 혼란하므로 온갖 병이 공격한다. '열심'은 일종의 병증인 셈이다."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내내 뜨거워진 심장으로 살았던 22년 교직인생.
심장이 뜨거워질 정도로 너무 열심히 살아서 병이 들었다고? 너무 억울하다. 열심히 사는 것을 미덕이라 생각했는데 이것이 병의 원인이라니 말이다. 열심이 병증이라니 말이다. 열심히 해서 암에 걸렸다니 말이다.
교사라는 직업을 좋아했고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 낙제가 찍힌 성적표를 받은 기분이다.
그런데 또, 이 글을 쓰다 보니 알겠다. 내가 '열심'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많이 쓰는지. 병증이 맞긴 하다.
5년 전 시작된 암세포
계속되는 탐색 결과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책에서 암세포가 4~7년 전에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한 개의 유방암세포가 자라서 손으로 느껴지려면 적어도 1센티미터는 되어야 하고, 이론적으로 평균 4~7년의 기간이 걸린다고 했다.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
다른 자료도 찾아보니, 유방암은 느린 암이라 유방암세포가 발현된 시기는 보통 5년 전으로 잡는다고 한다.
5년 전이라고?
5년 전이라면, 그럴만하다. 5년 전의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일중독증에 걸려 있었다. 외국 고등학교와의 국제교류에, 10회가 넘는 인문학 아카데미에, 학생들 상담과 대입 지도에 매일매일 야근을 했다.
그 5년 전이 시작이라고 하니 수긍이 됐다. 그 해에 고혈압, 고지혈증이 생겼고, 담낭염이 생겼다. 몸에 염증이 생기는 것, 고혈압, 고지혈증은 암의 전조증상으로 몸이 보내는 신호라는 걸 암에 걸리고서야 알았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몰아갔을까? 이건 따로 찬찬히 생각해 봐야겠다.
학교에 돌아갈 수 있을까?
5년 전, 미친 듯이 일에 빠져있던 나에게서 발병 원인을 찾아냈는데, 유방암은 5년이 지나서도 재발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발병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난 학교에 돌아갈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면, 학교에 돌아가도 괜찮을까?
이전과는 다른 나로 살아야 하는데, 나의 오랜 습성을 버릴 수 있을까? 심장을 뜨겁게 달구지 않고 교사로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