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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즈 Oct 26. 2024

병원에서 만난 새로운 세계

병원 풍경

"놀랍군요. 종양이 사라졌습니다."             

  

이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방, 난소 둘 중 하나라도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하며 병원에 가곤 했다. 지난 겨울, 종양이 발견된 이후 거의 매주 병원 일정이다. 병원에 도착하면 병원 앱으로 '내 일정'을 확인한다. 어떤 날은 유방외과, 어떤 날은 부인암센터. 또다른 어떤 날은 유방외과와 부인암센터 일정이 겹치기도 한다. 별관, 암병동, 본관을 오가며 병원에서만 걸음수 만보를 채우는 날도 있었다.      

< 어떤 날, 병원 앱이 안내하는 '내 일정' >   
11:30 별관 채혈실
12:00 본관 1층 영상 촬영
12:30 별관 심전도실
1:30 유방센터 유방 초음파
2:30 암병동 부인암센터 진료    

      

병원을 들락거리며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듯했다. 이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학교가 너무 바쁠 땐 며칠만 병원에 입원해서 쉬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 바보같은 생각은 이렇게 현실이 됐고, 난 그 세계에 들어와 있다.     

병원은 미로처럼 복잡하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건물을 오가며 여러 번 헤맸다. 진료 절차도 간단치 않다. 도착하면 도착접수하고 당일번호를 받는다. 진료를 본 후에도 수납, 상담, 다음 진료 예약을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번호표를 뽑아 진행해야 한다. 어떨 땐 세 개의 건물을 오가며 이동해야할 때도 있다.

나이든 분들이 복잡한 병원을 오가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좀 더 살 거라면 병원이라는 세계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러나 '이미 난 암환자'라는 사실을 금세 자각한다. 헛된 바람 대신, 더 늙기 전에  복잡한 병원 시스템을 익히게 돼서 다행이라는 억지 위안을 가져본다.     

환자가 병원에서 하는 가장 많은 활동은 역설적이게도 가만히 대기하는 것이다. 긴긴 대기 시간 동안 불안한 걱정탑을 한 층씩 쌓아 올리기도 하고, 망상의 나래를 한없이 펼치기도 한다. 채혈실, CT 촬영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른 관점으로 관찰하면서 말이다. 마치 이 일이 내게 닥친 일이 아닌 것처럼. 관찰자인 것처럼.          

              

줄지어 피 뽑는 사람들

"딩동"     


병원에서 부여받은 당일번호 B2353이 전광판에 뜬다. 은행에서 번호표를 뽑고 창구로 찾아가듯, 이곳에서는 채혈대를 찾아간다. 은행과 다른 것은 열 개의 채혈대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한쪽 팔을 걷어올렸다는 점이다. 열 사람의 고개 방향은 각기 다르다.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주사기를 보지 않는 사람도 있고, 피 뽑는 장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사람도 있다. 겁보인 나는 전자에 속한다. 작은 병 한 통을 뽑아가기도 하지만, 수술 전 검사가 걸린 날엔 대여섯 통을 뽑아내기도 한다. 그런데도 채혈은 3분에서 5분 정도로 금방 끝이 난다. 채혈실 의료진은 숙련된 노동자다. 3분에 한 명씩, 하루에도 어림잡아 백 명의 피를 뽑아내면서 단련된 솜씨인 듯하다. 은행 창구보다 순환하는 속도가 열 배는 빠르다. 다음 대기번호를 부르는 종은 채혈실에서 바쁘게 울린다.               

"딩동"     

"당일번호 A2323님~"               


나는 채혈한 부위를 지혈하는 5분동안 채혈실 사람들을 구경한다. 다음 사람들이 와서 앉고, 팔을 걷는 장면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흡사 SF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의료진과 환자 모두가 보이지 않는 빅브라더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같다.               


빅브라더의 명령이다. 피를 뽑아 체성분을 분석하여 인간을 분류하라. C등급으로 분류된 인간은 체세포 주사를 놓아 B급 인간으로 개조하라.               


이런 어이없는 상상은 난소낭종 촬영을 위한 복부 CT 검사에서도 이어졌다.                         



복부 CT 검사 중 펼쳐진 상상

난소낭종으로 복부 CT 촬영할 때에는 조영제가 급속도로 온몸에 퍼지는 강력한 경험 때문에 상상의 세계는 더 확장되었다. CT촬영 순서가 SF영화 속 미래 사회 인간 개조의 과정인 듯 여겨졌다. CT 촬영을 위해 갈아입은 파란색 옷, 조영제의 강력한 흡수력, CT 촬영 기기의 기계음, 방송으로 나오는 지시사항 등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소재가 되었다.

              

“1505, 1505 계신가요?”               


오랜 기다림 끝에 진행요원이 나를 부른다. 손을 들어 내가 1505번임을 알렸다. 그들은 탈의실에 가서 속세의 옷을 벗고, 파란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안내했다. 일회용 앞치마와 비슷한 재질의 파란 옷은 방사선 투시가 가능한 옷이었다.     

탈의가 끝나면 지정된 회색 의자에 앉아 1505 번호가 전광판에 뜨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라고 했다. 멍하니 전광판을 주시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1505가 맨 앞에서 깜박였다. 대기실로 안내되었고, 그들은 주사액을 주입하기 위한 관을 내 팔에 꽂았다. 그리고 다음 절차를 알려주었다.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가서 그 앞에서 대기하세요”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간 뒤 회색 의자에 앉아 번호가 불리기를 또 기다린다.  

  “1505, 1505”               

번호 호출에 대답하며 그들 앞으로 갔다. 그들은 또 다른 작업실로 나를 데려 간다. 그들이 데려간 작업실에는 원형의 기계가 중앙에 놓여있다. 원형의 기계 위에 누우라는 지시에 따라 몸을 올려놓자, 그들이 머리와 다리를 정해진 위치에 맞춰 정렬한다. 원형의 기계가 왔다 갔다 하며 온몸을 스캔한다.

잠시 후 주사액 관으로 조영제가 들어온다. 가슴부터 복부 아랫도리까지 순식간에 뜨거워진다. 오줌 싼 것처럼 아랫도리가 뜨겁다. 주사액은 혈관을 타고 1분 안에 온몸으로 퍼진다.               

"검사 시작합니다. 숨 들이마시세요."     

"숨 참으세요."     

"숨 쉬세요."               

방송 지시에 따라 숨을 마시고 들이쉰다. 나는 명령에 따라 숨을 쉬고, 기계는 몇 차례 통 속을 들락날락 한 뒤 끝이 났다.     

이로써 나는 새로운 DNA를 갖게 되었다. 몸 안에 새 DNA가 완전히 정착하기까지는 2일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2일간 DNA 정착을 위해 2리터의 물을 마시라는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그들은 이렇게 나를 개조시켰다.       

        

CT촬영이 끝나고 의료진은 조영제가 몸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2리터 이상의 물을 마시라고 했다. 조영제가 몸에서 빠져나가기까지 2일이 걸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물을 마시며 서서히 상상에서 깨어났다.                  

       

난소 둘 다 떼자고요?

CT촬영 결과를 보기로 한 진료날이었다. 두 시간이나 진료가 지연되어 기다리느라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러다 만나게 된 의사가 던진 첫마디는 난소를 둘 다 떼자는 것이었다.


“난소 양쪽 다 떼죠!"             

  

난소 하나 더 떼는 것을 얼굴에 있는 점 하나 더 빼는 것 마냥 가볍게 던졌다. 의사의 가벼운 한마디는 내게는 강력 펀치가 되어 날아왔다. 미래사회 인간개조 어쩌고 하며 놀고 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금 내게 벌어지는 상황이 더 영화같았다. 전편과는 전혀 다른 예측불허의 새로운 전개였다.

  

"네? 지난번에는 난소 하나만 떼는 것으로 말씀하셨잖아요."        

       

 CT검사결과가 안 좋은 것인지 걱정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저… 난소암인가요?”     

“아뇨. 그건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수술해 봐야 정확한 것은 알 수 있고요. 하지만 유방암도 있으니 난소 양쪽 다 떼는 게 좋긴 하죠. “     

"네...."               


진료실에서는 더 묻지 못했다. 포항에서 진료받으러 온 환자는 6시 기차표를 예약했는데 진료가 2시간이나 지연되서 기차를 못타게 되었다며 방법이 없겠냐고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며 진료실에 들어왔다. 부인암센터 13진료실 앞 복도에는 대기하는 환자가 가득했다. 그래서였다. 아니, 사실은 의사의 말에 그냥 알겠다고 답한 것은 대기하는 환자들 때문도 아니고, 정신없이 바빠보였던 의사와 간호사 때문도 아니었다. 사실은 난소 둘 다 절제하자는 이야기에 머리가 멍해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서 그랬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진료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집에 오자 걱정의 물꼬가 터졌다. 난소 하나만 있어도 기능을 다하기에 난소 하나 절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난소를 둘 다 떼어내면 부작용이 커진다. 고혈압, 당뇨, 관절통, 골다공증 등의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난소를 둘 다 떼야 하는 것일까? 그 정도로 난소낭종이 위험한 것일까? 게다가 난소를 둘 다 제거한다면 자궁은 왜 남겨두는 것일까? 진료실에서는 정지되었던 뇌가 다시 움직이며 수많은 걱정과 질문들을 쏟아냈다.      


병원 세계에 상주하는 의료진에게

병원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병증의 상태를 처음 듣게 된 진료실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정하라고 한다. 난소를 하나 뗄지 둘 다 뗄지의 선택을 짜장면 먹을지 짬뽕 먹을지 선택하는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에 선택하라 하는 것이다. 항암치료를 할지 말지의 결정도 마찬가지다. 항암치료 여부를 알아보는 400만원 상당의 온코타입-dx 검사를 할지 말지 결정할 때도 그랬다. 온코타입-dx 검사로 할지, 온코프리 검사로 할지 결정하는 것도 그랬다. 설명을 듣고 충분히 생각해서 결정할 시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병원 세계에 상주하는 의료진들은 이런 일들이 자주 있는 익숙하고 평범한 일일테지. 하지만 이 세계에 첫 발을 들인 사람에게는 처음 겪는 낯설고 두려운 일이다. 병증의 상태를 듣고 난 후, 받아들이고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 선택의 상황에서도 A안과 B안의 장단점을 상세하게 설명해 준 뒤, 환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줄 순 없을까? 그러나 지금 종합병원에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5분동안 3명의 환자가 예약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분 진료를 보기도 하는 상황에서는.

난 시간이 있는 의사가 필요했다. 나의 난소낭종 상태를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걱정과 의문을 귀기울여 들어줄 수 있는.

그러나 내가 들어간 병원이라는 세계는 그럴 여유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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