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에게 치유에 집중할 평화를!
기억하세요.
행복은
빛나는 장미 한 송이가 아니라,
수북하게 모여있는 안개 꽃다발이라는 것을.
[출처] 가수 신해철의 <음악도시> 레전드 라디오 클로징 멘트
암환자가 되고 보니, 남은 생은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앞만 보고 가던 사람이 달리던 말에서 내려 뒤도 보고 앞도 보는 시간이다. 남은 생이 길지 않을 수 있단 걸 생각해 본 것도 처음이다.
교육, 학교 혁신, 공교육 이런 대의를 보며 살다가, 아프고 나서는 몸을 돌보며 소소한 일상을 산다. 그래서 신해철의 <음악도시> 클로징 멘트에서 말한 안개꽃 행복론이 좋았다. 행복은 눈에 띄게 화려한 장미꽃이 아니라 소소한 안개꽃 다발 같은 것이란 말이 좋았다. 이 말은 나의 평범한 일상을 수북한 안개꽃다발로 만들어 주었다.
안개꽃 같은 나의 일상
밤에 안 깨고, 수면점수 괜찮고, 개운하게 일어났을 때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비워낼 때
계단운동 마치고 아이폰 건강 앱에 '오른 층수' 20층이 찍힌 걸 볼 때
한여름, 운동하고 땀 흘리고 난 뒤 가슴속까지 시원해지게 찬물로 열을 식힐 때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한 뿌듯한 기분으로 산에서 내려올 때
한 발로 지탱하는 필라테스 동작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캠핑의자 펴는 데 걸린 시간보다 앉아 있는 시간이 더 짧았지만, 친구와 한강공원에서 저녁노을 보며 샌드위치 먹을 때
Like a wind 하루에 2마디씩 익혀 드디어 16마디 연주가 가능하게 될 때, 메트로놈에 맞춰 할 수 있게 됐다며 꺄악! 환호를 지를 때
기타 레슨 마치고 친구집에 가서 친구가 해준 건강한 집밥 먹을 때
공원 벤치에 누워 바람맞으며 하늘 볼 때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공원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을 때
더워지기 시작한 여름, 산책로에서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공간을 찾아내 돗자리를 펴고 누웠을 때
유튜브 보고 처음 해 본 요리가 먹을만한 맛을 낼 때
월요일 루틴으로 운동하고 돌아와 브런치 연재를 마쳤을 때
브런치 글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토요일 친구집에 가서 건강한 점심을 먹었을 때
소파에서 낮잠 자다 눈떴는데 바람이 살랑거리며 볼을 간지럽힐 때, 그렇게 나른한 휴일 오후.
그럴 때 난 행복을 느낀다.
일상의 평온을 깨뜨린 자
이런 일상의 평온함이 깨졌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지 못한 지 7일째다. 12월 3일 밤 10시 30분부터다.
"누나야 난리 났어. 계엄령 내렸어."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며 동생이 소리쳤다.
"뭐라고? 장난하지 마. 누가?"
2024년에 계엄령이라는 동생의 말을 믿을 수 없어 TV를 켰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총을 든 계엄군이 창문을 깨고 국회에 들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국회로 달려온 시민들이 맨몸으로 무장한 군인을 막아내는 모습을 지켜봤다. 밤새 뉴스를 확인하느라 잠을 설쳤다.
다음날 만난 친구들은 다들 비슷하게 밤을 보냈다 했다. 퀭한 눈, 피곤에 절은 피부가 지난밤을 말해주었다. 수면이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데 전 국민의 수면을 이렇게 망쳐놓다니.
암환자의 루틴으로 평온하게 이루어지던 하루는 시시각각 바뀌는 뉴스를 확인하느라 깨지고 있다.
넷플릭스 시청률도 떨어졌다한다. 그 어느 영화, 드라마가 이보다 더 스펙터클 할까? 이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개연성이 너무 없다고 욕먹을 정도. 하루에도 말을 여러 번 바꾸는 캐릭터는 또 얼마나 욕을 먹겠는가. 너무 억지라고 시청자 게시판에 욕이 한바닥 쏟아질 걸?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조속히 해결되어 나의 평온한 일상을 찾고 싶다.
주말 루틴도 다 깨졌다.
암환자가 집회에 나가야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