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시간
비극은 언제나 발 뻗고 잘 때쯤 찾아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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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언제나 입꼬리를 올릴 때 찾아온단다
- 허회경, '김철수 씨 이야기' 노래 가사 중에서 -
유튜브뮤직에서 내 플레이리스트를 종합하여 2024 Recap 최애 뮤직으로 허회경의 '김철수 씨 이야기'를 뽑았다. 올해 내가 가장 많이 들은 곡이란다. 비극은 발 뻗고 잘 때쯤, 입꼬리를 올릴 때쯤 찾아온다는 두 문장에 꽂혀 기도문인 것처럼 마음에 새기며 들었다. 비극이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게 입꼬리 올리지 않으려 조심했다. 발 뻗고 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비극의 방문
1차 병원에서 처음 조직검사 했을 때, 20퍼센트의 확률에 내가 들어갈 리 없다고 맘 놓고 있었다. 그때였다. 비극이 처음으로 날 찾아왔다. 암소식과 함께.
유방암 수술 후 2주 지나 수술결과 들으러 병원에 갔을 때도 그랬다. 비극의 두번째 방문이었다.
대학병원 진료에서 의사는 촉진해 보더니, 0기 상피내암일 것 같다고 했다. 수술해 봐야 정확한 병기를 알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0기 상피내암은 유방암 환자들 사이에서 평생 쓸 운을 다 끌어모아 썼다고 할 만큼 행운이라고들 말한다. 그 말에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비극은 또 나를 찾아왔다. 수술해서 열어보니, 0기 상피내암과 1기 침윤성 유방암이 둘 다 있다고 했다. 기대했던 결과가 아니었지만 실망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항암치료할지 말지 여부를 비극과 재회한 그 자리에서 결정해야만 했다.
"이 정도면 예전엔 무조건 항암 했어요."
수술결과를 설명하던 의사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 정도면 싸게 가져가는 거라는 상인의 담화만큼 가벼운 무게였다. 예전이라 함은 어느 정도의 과거를 말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10년 전인지 2년 전인지.
의사는 항암치료여부를 검사하는 온코타입-DX검사를 할 것인지 물었다. 그냥 항암치료받을 것인지, 항암치료가 효과가 있는지 검사해 보고 결정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온코타입-DX검사가 무엇인지 유튜브와 네이버 유방암이야기 카페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답할 수 있었다.
의사들은 유튜브와 네이버에서 정보를 구하지 말고 의사에게 물어보라고들 말한다. 그렇지만 의사에게는 그럴 만한 시간이 없다. 유튜브와 유방암이야기 카페에서 미리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5분 이내의 짧은 진료시간 내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 온코타입-DX 검사 안내 >
(주)비엠에스 안내문
1. Oncotype DX란?
Oncotype DX Breast Recurrence Score(유방암 유전자) 검사는 처음 유방암을 진단받은 환자 중 림프절 전이 음성 또는 양성, 에스트로겐 수용체 양성(ER+), HER2 음성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검사로 유방암 조직에서 21개의 유전자의 활성도를 측정, 분석하여 유방암 환자분의 향후 재발할 가능성과 항암치료 효과를 확인하는 검사입니다.
2. Oncotype DX로 어떤 결과를 확인할 수 있나요?
검사 결과, 0-100 사이의 Recurrence Score(RS) 값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RS가 낮을 경우 재발률이 낮으며 화학 치료의 효과도 낮으므로 호르몬요법을 권유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RS가 높을 경우 재발률이 높으며, 화학요법의 효과가 크므로 화학요법과 호르몬 요법을 병행하여 재발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습니다.
3. Oncotype DX검사는 신뢰할 수 있는 검사인가요?
Oncotype DX는 50,000여 명 이상의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다양한 임상실험을 통해 정확성, 일관성을 입증한 검사입니다. 21개의 유전자의 보다 정확하고 정밀한 측정을 위해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3차례 종양 샘플 검사가 진행됩니다. 또한, 세계 주요 가이드라인에 포함된 유일한 유전자 검사로 2004년 시작된 이래로 전 세계적으로 150만 명 이상이 검사를 진행한 신뢰성 높은 검사입니다.
4. Oncotype DX검사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Oncotype DX는 수술 시 제거된 종양 조직 일부를 이용하여 진행되므로 추가적인 수술이 필요 없습니다. 검사 실시 여부가 결정되면 병원에 보관되어 있던 종양 조직 샘플 일부(슬라이드 15장 병원 제작)를 미국 Exact Science사의 중앙 검사실 'Genomic Health'로 발송되어 감사가 진행됩니다.
검사 의뢰 결정 후, (주)비엠에스 담당자가 병원으로부터 제공받은 환자분의 연락처로 전화드려 검사 안내, 비용 결제 방법, 검사 신청에 필요한 사전 제출 서류들을 안내드릴 예정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사전 제출 서류 : 슬라이드(15장) 제작 비용 수납했다는 병원 진료비 영수증, 신분증 사본(해당 서류는 꼭 사진으로 찍어 보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 비용 결제 : 금액은 385만 원으로 (주)비엠에스에 결제하셔야 하며, 결제 방법은 계좌이체(현금영수증 가능) 혹은 카드결제 가능합니다.
미국으로 날아간 나의 세포
온코타입-DX검사를 하기로 했다. 나의 암세포는 미국 Exact Science사의 중앙 검사실 'Genomic Health'로 보내졌다.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국에 나의 암세포가 갔다.
검사 결과는 2주 후에 나온다고 했다. 또 기다림의 시간이다.
조직검사에서 암이 될 20퍼센트의 확률에 내가 들어가지 않을 거라던 기대.
수술 후 가끔 병기가 바뀔 수 있지만 나는 아닐 거라는 기대.
두 번의 기대가 처참히 깨진 뒤, 겸손하지 못했던 나를 반성했다. 그리고 '발 뻗고 있지 말자', '입꼬리도 함부로 올리지 말자' 다짐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나오는 대로 받아들이자고 꾹꾹 눌러 마음에 새겼다.
일주일 추가된 불안과 기다림
온코타입-DX검사결과가 나오기로 한 날, 오전 8시 전화를 기다렸다. 검사 결과는 10시 45분 병원진료실에서 듣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검사 결과 이메일이 미국에서 아직 안 왔다고 했다. 밤사이 결과가 오는 것 봐서 진료를 일주일 연기할지 결정한다고 했다. 병원갈 채비를 다하고 기다렸다. 8시 조금 넘어 전화가 왔다.
"미국에서 이메일이 안 왔어요. 다음 주로 진료를 연기해야겠어요."
진료 연기 전화를 받고 맥이 확 풀렸다. 외투를 입은 채로 그대로 주저앉았다. 결과가 오는 것, 안 오는 것 확률은 반반이었다. 나에겐 결과가 오지 않는 선택지가 도착했다.
진료가 일주일 연기되면 항암, 방사선 치료 일정도 연기된다. 기다림의 시간은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간은 너무 천천히 갔다.
친구가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정색하며 뾰족하게 답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일 거야.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기로 했어. 입꼬리 올리면 비극이 찾아오더라고.“
비극이 어느 틈엔가 친구와의 이야기를 보게 될까 봐서 그랬다.
일주일 연기된 시간은 회피 전략도 통하지 않았다. 회피 성향이 강한 나는 힘든 일에 눈을 감아버린다. 생각을 정지시키고 그 일이 없는 일인 양,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암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그랬다. 그러나 이번엔 그 전략도 통하지 않았다.
'암환자가 아닌 자유인으로 생활하는 일주일이 나에게 더 생긴 거라고 생각하자. 항암을 하게 될지 모르니 일주일동안 체력도 더 기르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이런 다독거림도 다 소용없었다.
발 뻗고 있지 않은 덕에, 입꼬리 올리지 않은 덕에
지독히도 길었던 일주일이 지났다.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 밤잠을 설쳐 멍한 상태로 일어났다.
운을 바라지 않기로, 희망을 갖지 않기로 했다.
병원 가서도 기다렸다. 이 죽일 놈의 기다림.
책을 읽어보려 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시간 기다려 의사를 만났다. 3주를 기다린 온코타입-DX검사 결과를 그가 말했다.
"항암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처음 암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울지 않았는데. 대학병원에서 최종 진단 받을 때에도, 수술결과가 기대했던 것보다 안 좋게 나왔을 때에도 울지 않았는데.
그 날은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의사가 바쁘게 진료 보고 있어서 눈물 따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딱딱하게 사무 보는 사람 앞에서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긴 싸움 중 1차전이 끝났다. 발 뻗고 있지 않은 덕에, 입꼬리 올리지 않은 덕에 비극의 방문을 막을 수 있었다. 방사선치료 2차전, 난소 자궁 적출 수술 3차전이 남았다. 남은 싸움을 위해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다잡았다.
환우인 초이샘이 이야기했다.
발 안 뻗고 입꼬리 안 올리고 살면서도,
불안하지 않고 평온하게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 숙제라고.
안심비용 429만 원
온코타입-DX검사를 위해 쓴 429만 원은 안심비용인 셈이었다.
온코타입-DX검사는 병원에서 결제한 것이 아니어서 실손보험 청구가 안된다. 병원에서 슬라이드 제작에 사용한 진료비만 실손보험 청구 가능하다.
검사 안 하고 항암치료 안 한다고 할 배짱은 없었다. 항암치료 안 받고 불안해하느니 429만 원을 쓰고 안심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주)비엠에스 직원과 전화통화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이스피싱 같은 느낌도 든다. 암세포 슬라이드가 어디로 보내졌는지 어떤 검사를 했는지 모르니까 말이다. 심지어 결과지를 받지도 못했다. 의사가 보고 결과만 알려줬다. 429만원짜리 검사인데 나는 실체를 보지 못했다.
온코타입 DX 검사를 대체할만한, 온코프리 검사를 우리나라 의료진이 만들었다고 들었다. 온코프리 검사가 상용화되고, 의료보험 적용도 되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지독한 기다림의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