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
10년 전 제자들
스승의 날, 10년 전 제자들에게 연락이 왔다. 스승의 날 즈음이면 매년 연락하는 녀석들이다.
그때 난 유방암 수술 후 방사선 치료를 앞두고 있었고, 난소 수술이 잡히지 않아 다른 병원을 알아보며 머릿속이 복잡한 시기였다. 그래서 5월이 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는 잠시 망설였다. 만남을 최소화하고 치병에 몰두하고 있어서이기도 했고, 원래 텐션의 절반도 안 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른 텐션에 아프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제자들을 만나 괜찮은 척 연기할 자신도 없었다.
2016년 졸업 후 10년 정도 매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녀석들이다. 올해는 만남을 건너뛰어야겠다 생각하며 이제 그만 오라고 했다.
“이건 뭐 3년상도 아니고, 이제 그만 챙겨. 이렇게 매년 찾아오지 않아도 돼. 10년이 다 돼간다. 이제 그만해도 돼. 너흰 할 만큼 했어.”
“저희가 좋아서 찾아뵙는 거예요. 혹시 선생님, 저희 만나는 거 부담스러우신 거예요?”
“아니, 절대 아니지. 나야 만나면 좋지만, 너희들 취업하고 사회 초년생이라 한창 바쁠 때라는 걸 아니까 그렇지.”
그만 오라고 이야기했다가, 자기들이 싫은 거냐는 이야기에 또 지고 말았다.
제자들의 청춘 드라마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 주제는 매년 달라진다. 주인공은 그대로인 채 에피소드가 달라지는 청춘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취업준비 중이던 작년에는 내년에 보자고 인사하며, 내년엔 취업해서 올 거라고 말하길래 ‘취업 안 해도 괜찮다.‘고 했더니 그 말이 무어라고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렇게 말했던 녀석들이 올해는 취업해서 나타났다. 그래서 이번 청춘 드라마 주제는 직장생활이다. 달라진 직장문화 이야기를 들었다. 회식을 금요일 오후 일과 시간 내에 식사를 하거나 공연을 보는 것으로 한다고 한다. 일과 이후 술 마시는 회식문화는 없어졌다 한다. 직장인들끼리의 관계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적으로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한 직장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능력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도 신기했다. 힘들게 취업한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워했고, 직장에 적응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박수를 쳤다.
“너희 이야기 듣다 보면 청춘 드라마 보는 것 같아. 근데 이 주인공들 연애는 안 하니?”
다음 편은 로맨스 장르이길 바란다는 말로 내년의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나를 성장시키는 아이들
제자들을 만나 청춘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 20년 전 제자가 들려주는 미국 생활 이야기, 영화 이야기도 좋았다. 힘든 시간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있는 10년 전 제자를 만난 것도 좋았다. 이들은 제각각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본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영역에서.
그래서 나는 또 다짐한다.
내가 지금 만나는 아이의 모습은 그 아이의 엄청 긴 시간 속의 아주 일부일 뿐이다. 속단하지 말지어다. 지금은 잠시 방황하는 때일 수도 있으니.
학창 시절 수능을 앞두고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자주 혼나던 녀석이 졸업 후에 반창회를 열고 영업직 사원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그 녀석은 주변에 관심이 뻗어있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없었던 거다. 책보다 사람에 관심이 많은 그 아이는 사회에서 더 크게 빛났다.
이런 깨달음이 제자들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제자들을 만나면, 그 시간으로 돌아가 그 시절의 나를 만나게 된다. 10년 전 아이들을 만났던 시기는 내게 암흑기였다. 농어촌 승진가산점이 있는 학교라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문화가 팽배한 곳이었다. 너무 힘들어 2년 만에 탈출한 곳이다. 담임하면서 학급으로 숨어들었던 때인데, 그때 제자들이 계속 찾아온다. 내 마음이 힘들어 유치하게 학생들에게 삐지고, 감정싸움하고 진짜 부끄러웠던 시절인데 말이다. 그 아이들이 힘들었던 암흑기를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준다.
아이들은 이렇게 나를 성장시킨다.
제자들에게 받은 선물
그런데 올해 스승의 날 만난 제자들은 나에게 더 큰 선물을 주었다. 그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그 만남이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
암에 걸리고 나니, 인생을 잘못 산 것 같았다. 학교에서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니 학교에 돌아갈 자신도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게 10년 전 제자들이 찾아온 거였다. 뭘 한다고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왔을까 후회하고 있던 나를 찾아온 거였다.
찾아와서는 해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10년이 지나서도 기억난다고 하고 고맙다고 한다.
지나온 삶을 온통 부정하고 원망하던 나에게 그 아이들이 일깨워준다.
내가 한 일은 누군가의 삶의 궤적에 기억을 남기는 것이었단 걸,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준 거란 걸.
교사는 해준 것보다 훨씬 많이 받는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해줬다고 20년 동안이나, 10여 년 동안이나, 5년 동안이나 잊지 않고 나에게 감사하다고 할까? 20년 전 아무것도 모르던 신규교사 시절 열정만 가득했고 부족함 많은 나였는데…. 10년 전 학교가 힘들어 학급에 숨어들던 나였는데….. 5년 전 나를 위로해 준 건 오히려 그 아이들이었는데. 내가 준 것에 비하면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
꽃은 그냥 피는 법
혁신학교에서 많은 일을 벌이고, 내가 벌인 일에 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살았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난 이 정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중학교로 옮겼을 때에도 중학교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단 걸 보여주고 싶었다. 혁신의 조건이 되는 학교에서만 혁신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느 학교에 가서도 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내고 싶었다. 공교육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가 암에 걸려 멈춰 서게 되었다. 속도를 줄여서 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질주하다가 강제로 브레이크가 걸려 멈춰 서게 됐다. 강제로 멈추게 된 힘에 의해 고꾸라졌다.
고꾸라진 채 반추해 본 지난 삶은 오류 투성이었다. 그런데 스승의 날 만난 제자들이 내가 했던 진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게 해줬다.
드러나지 않게 늘 해오던 공기 같은 일들이 내가 했던 중요한 일이었단 걸.
꽃은 그냥 핀다.
누구한테 봐달라고 핀 꽃이 아니다. 누가 보건 보지 않건 그냥 꽃을 피우는 것이 자기의 일이다. 꽃은 그냥 피는데 난 무얼 바라고 있었을까? 보이기 위해 한 일은 아니었을까?
난 아무 일도 아닌 일로 화를 내기도 했다. 화 낼 일이 아닌 일에도 무에 그리 화가 났을까? 내가 이렇게 애쓰는데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그랬을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당연한데 성과를 바라고 누가 봐주기를 바라고 꽃을 피웠던 걸까?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내 일이 많다고 억울했던 마음, 나만 고생한다고 억울했던 마음, 이 정도는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저 내 일을 하면 될 뿐인데, 뭘 그리 애썼을까? 그리 애쓴 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학교에 돌아가면 난 또 하던 대로 그렇게 일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스승의 날 만남을 계기로 학교에 돌아가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남들에게 보이려는 모습 말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소한으로.
그저 나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으로.
< 명상 유튜브 내용 >
자신이 하는 행동에 집중하고 묵묵히 행동을 해나가던 사람.
누가 알아주든, 누가 보아주든, 누가 어떤 말을 하든
자신이 하는 일에 그저 몰입하고 있는 그 사람.
그저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알려지든 알려지지 않든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죠.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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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보세요. 봄날에는 제주에는 유채꽃이 많이 핍니다.
그 많은 수많은 유채꽃들도 자신을 보여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계절 인연에 따라 피고 질 뿐 그저 자신이 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누가 지나가다가 물끄러미 서서 사진을 찍고 예쁘다, 향기롭다고 하면 그저 하는구나라고 바라볼 뿐.
사람이 보든 보지 안 든 보지 않든
산속에 피는 꽃이든 길가에 피는 꽃이든
그저 자신의 할 일만 할 뿐입니다.
누가 보아준다고 기뻐하지 않고
누가 외면한다고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그렇습니다. 그저 자신이 할 일을 시절인연에 따라 마땅히 할 뿐
- 귓전명상 채환TV "왼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