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의 루틴
쳇! 봄이 뭐라고
봄이 오는 것도 싫다.
봄이 왔으니 힘내라는 응원도 싫다.
나는 암에 걸렸는데 봄이 오는 것이 싫다.
봄이 오는 것은 진짜 싫은데
핸드폰 갤러리엔 꽃사진이 가득이다.
봄이 오는 것은 정말 싫은데
따뜻한 봄볕 쬐러 산책은 자꾸 나간다.
암환자의 쓸쓸함
봄이 왔으니 힘내라는 응원 문자를 받고는, 애먼 봄에게 심통을 부렸다. 봄이 와서 꽃도 보고 따뜻한 봄볕 쬐니 좋으면서, 싫다고 했다. 휴지통에 들어간 종이뭉치처럼 마음이 구겨져서 그랬다.
왜 나만 혼자 여기?
그런 감정이었다. 왜 하필 내가 암에 걸려서 나만 여기에 있는지.
내가 없어도 학교도 세상도 잘 돌아가고, 내가 없어도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게 당연한 건데 난 내 처지를 생각하게 됐다. 난 왜 이렇게 쭈그러져 있어야 하는지.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흘릴 눈물이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다. 암선고를 받던 겨울에 흘렸던 눈물보다 봄 지나 여름에 흘리는 눈물이 더 놀라웠다.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다니. 아직도 내가 암환자라는 게 슬플 일인지.
여름에 흘린 눈물은 슬픔이라기보다 쓸쓸함이었다.
49세는 암에 걸리지 않았어도 쓸쓸함을 느낄 나이긴 하다. 그간 나이에 맞지 않게 팔팔하게 나대며 살았으니 이런 식으로 주저앉힌 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암환자의 예민함
냉동밥을 데우다 유리그릇이 깨졌다. 플라스틱 용기가 몸에 안 좋다고 해서 바꾼 유리그릇이었다. 냉동실에서 꺼내 바로 전자레인지에 돌렸다가 깨져버렸다. 냉동실에 남은 마지막 밥이었다. 밥을 하기엔 저녁식사가 너무 늦어질 것 같아 네 조각으로 깨진 유리그릇에서 밥을 건져내기로 했다. 건져낸 밥으로 저녁을 대충 해결했다. 그런데 밥 먹고 난 후 목이 칼칼해졌다. 목에 미세한 유리조각이 걸린 걸까? 켁켁거려보기도 하고 물을 마시기도 하고 목에 좋은 프로폴리스를 먹기도 했다. 이것저것 해봤지만 목에 뭐가 걸린듯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수술 후엔 감염과 림프부종의 위험성 때문에 상처 나면 안 좋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그 상처는 수술한 팔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내 자책감이 밀려왔고 수많은 걱정들이 파도처럼 뒤따라왔다.
'난 왜 조심성 없이 행동해서 이런 일을 만드는 걸까?'
예민함이 폭발해 버렸다. 그릇 하나가 깨진 것뿐인데 몸의 균형감각, 아니 마음의 균형감각이 깨져버렸다. 허벅지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치아 시림도 심해진 것 같고, 수술 상처부위가 콕콕 쑤시는 것 같고, 겨드랑이 상처부위 부종이 장액종인지 림프부종인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예민하게 하나하나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아.... 힘들다.'
그릇 하나 깨진 것이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조심하며 사는 일상에선 그릇 하나 깨진 것이 불씨가 되기도 했다.
참아왔던,
잊으려 했던,
긍정의 마인드로 눌러왔던,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날이었다.
나를 안아주는 숲
마음이 힘들 땐 숲으로 갔다. 혼자 집에 있으면 심연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집 근처 공원에 가서, 앙상한 가지에서 연둣빛 잎이 나서 초록빛 무성한 숲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봤다. 비 오는 날의 숲은 더 좋았다. 비 와서 사람들이 별로 없어 온전히 숲을 누릴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음악을 들으며 숲길을 걷고, 비 오는 어떤 날은 음악도 멈추고 숲의 소리를 들었다. 바람소리,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새소리, 빗방울 소리와 함께 있었다. 숲이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듯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셔 숲의 기운을 몸 안에 가득 담았다.『삶의 발명』(정혜윤) 책에 나온 문구처럼 내 삶의 구멍을 숲이 메워주는 것 같았다.
"마치 내 삶에 생긴 구멍이
하늘과 반들반들한 바위와 나팔꽃이 있는
더 넓은 세상으로 메워지는 듯했다." 『삶의 발명』
숲 속 명상
숲 속에 포옥 안긴 것처럼 나무 사이에 앉았다. 나무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명상 음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면에서 치유되고 있다'는 말에 눈물이 나왔다. 좋아지고 건강해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나 보다. 숲에 안겨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들었다.
나는 매일매일 모든 면에서 좋아진다
나는 매일매일 모든 면에서 건강해진다
나는 매일매일 모든 면에서 치유된다
나는 매일매일 모든 면에서 정화된다
이미 모든 면에서 치유되었음에 감사합니다
호흡에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평소 숨 쉬던 대로 숨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만 지켜봤다. 명상 음악에서 나온 말 중에 '다 지나간다'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 이 말이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이 시기도 지나갈 거라는 말이 이렇게 큰 위안이 될 줄 몰랐다.
'너무 애쓰지 마라'는 말은 지난 시간들을 부정했던 나에게, 그렇지 않다고 그간 고생했다고 나를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숲에서 많은 눈물을 거름으로 흙에 뿌렸다. 이만하면 괜찮다고 머리로는 생각했는데, 마음은 그 생각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암에 걸려 쉴 수 있고, 내 건강을 챙길 수 있게 되었고,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괜찮다고 여겼다.
그런데 명상을 통해 듣게 된 마음의 소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고 심연에 있는 감정도 밖으로 끄집어냈다. 봄에게도 심통을 부리던 마음도 만났고, 구겨진 마음도 조금씩 펴졌다.
삶의 발명
“세상의 아름다운 장소들은 무거운 영혼을 가진 사람의 발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내밀게 돕는다.
바깥공기를 마시게 한다.
나는 (내 몸의 회복을 걱정하는) 나이면서 나 자신 너머, 내 바깥에 있는 존재가 되어갔다.
내 생각이 아니라 내 바깥세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나는 다시 사고 이전의 자유롭던 내가 되어갔다.
자연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리를 놀라게 할 일을 선물한다.” 『삶의 발명』
숲과 강과 바다는 내 영혼의 무게를 가볍게 도왔다. 내 안에 갇힌 나에서 생각을 넓혀주었다. 아프고 나서야 몸의 치유력, 자연의 치유력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산책하며 듣는 유튜브 주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암 정보 위주의 알고리즘이 '어떻게 살 것인가' 삶에 대한 주제로 바뀌었다. 몸에 힘을 빼고 몸을 살리는 방식으로 내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음식도 만들고, 계절이 바뀌면 옷장도 정리하고 이불 빨래도 했다. '살림'이라 불리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난 이 많은 일들을 하나도 하지 않고 살았다. 바깥일만 하고 살았다. 먹는 것은 간편식으로 해결했다. 청소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냥 살았다. 나의 삶은 돌보지 않고, 일만 했다. 학교에서 죽어라고 일만 했고 집에 와서는 또 수업 준비를 했다. 그러다 쓰러져 소파에서 잠들 때도 있었다. 진학철이 되면 추천서, 자기소개서 봐주느라 1시간 자고 출근하기도 했다.
늘 피곤했고 잠이 부족했다. 그래서 주말엔 잠을 몰아서 잤다. 피곤해서 손가락 까닥할 힘도 없어 집안일은 아무것도 안 했다. 이불을 빨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옷을 정리하는 일은 엄마가 한 번씩 와서 해주던 일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내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하지 않았다. 일만 했다.
너무 할 일이 많고, 지쳐 있던 상태라 진짜 소중한 사람들한테까지 시간과 마음을 내지 못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소홀하게 대했다. 일에 치여 사람들과의 관계도 귀찮아지고 있었다. 지쳐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연락, 해야 할 일, 나에게 부과되는 역할 이런 것들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내 삶에 빨간 신호등이 켜졌고 멈춰야 할 때였지만 신호등을 못 본 채 달리고 있었다. 그런 내게 암이 제동장치가 되어주었다.
드디어 멈췄다.
전업치병
'전업치병'은 '주마니아'(암 치유 전도사, 『말기 암 진단 10년,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저자)가 나온 유튜브에서 들은 말이다.
https://youtu.be/nkRVkiRtgiE?si=EDZo1_uKbc0SJcuf
전업주부, 전업작가처럼 전업치병이라니.
이 말을 듣고 질병휴직 기간의 방향이 잡혔다. '전업치병' 하기로 했다.
우리 몸에 암세포는 누구에게나 매일 생겨난다고 한다. 그 암세포를 면역세포가 죽이는데, 면역력이 약해지면 암세포가 살아 암이 되는 거라고 한다. (의학정보는 의사들이 하는 유튜브에서 주로 정보를 얻는데 그중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다.)
암에 걸렸다는 것은 암이 살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몸을 건강한 몸으로 바꾸는 몰입하는 기간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주마니아가 말하는 '전업치병'기간인 것이다.
<주마니아 전업치병 유튜브 설명 요약>
암환자가 되었다는 것은 질병에 걸릴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것.
질병의 관성에서 건강의 관성으로 회복해야함
질병에도 관성이 있다. 가만있으면 악화되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리로 가려는 힘이 있다. 힘을 거슬러 건강의 관성으로 바꾸는 것이 치병.
치병하는 에너지를 몰아서 건강성을 회복하는 것이 전업치병.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있다.
초기암은 3~6개월, 말기암은 1년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한 암환자의 루틴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 건강한 식습관, 충분한 수면, 운동에 집중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유방암에 좋다는 몽땅 주스를 마신다. 먹기 싫은 브로콜리와 양배추를 사과, 당근, 케일, 비트와 같이 진공블렌더로 물이 거의 없게 죽처럼 갈아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는다. 한 번 갈아두면 물이 생기거나 상하지 않고 일주일은 먹을 수 있다.
아침은 과일과 야채, 삶은 계란으로 먹는다. 가볍게 먹으려고 무던히 노력 중인데 잘 안된다. 아침 식사사진을 친구들에게 보내면 여전히 많다고 한다. 점심은 한식으로, 저녁은 닭가슴살과 샐러드, 그릭요거트로 먹는 편이다. 양을 줄이는 것이 관건이다.
잠은 10시~6시에 자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보통 11시 정도에 자고, 늦어도 12시 전에는 자려고 노력한다.
운동은 필라테스 학원까지 30분씩 왕복 걷기, 필라테스, 19층까지 계단운동을 주로 한다. 운동을 하고 나면 괜스레 뿌듯하다. 하루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을 다 한듯한 기분이 든다.
월요일은 브런치 글을 쓰는 날이다. 필라테스 운동을 하고 와서 이번에 새로 꾸민 ‘작가의 책상'에 앉아 하루종일 글을 쓴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정리하는 데 보통 10시간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돈이 나오는 일이 아닌데도 매주 이렇게 하는 이유는 창작의 즐거움 때문이다. 뭔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어 좋다. 이것이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힘을 주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기도 하지만…
화요일과 목요일엔 필라테스 운동하고 와서 기타연습하고 기타 레슨 받으러 간다.
수요일과 금요일엔 주로 산에 간다. 숲 속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과일과 간식도 먹고, 책도 읽는 시간이 좋다. 오르막길이 싫어 산에 오르는 것을 무의미한 일이라고, 내려올 걸 왜 오르냐고 했던 내가 이렇게 변했다.
집 주변 공원을 산책하는 시간도 좋아하는 시간이다. 돗자리 펴고 앉아서 책을 읽기도 하고, 벤치에 누워 볕을 쬐기도 한다. 처음엔 학부모나 졸업생을 만날까 봐 낮에 나가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한두 번 나가다 보니 그런 걱정은 내려놓게 되었다.
누워서 바람을 맞으면 좋다. 누워서 하늘을 봐도 참 좋다.
나는 건강해지는 중이다. 다른 것보다 최우선으로 내 몸에 집중하는 중이다.
몸에 힘을 빼고 사는 법을 터득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