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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식날

학교 아이들이 생각났다.

by 나즈 Mar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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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오늘 00가 찾아왔는데 000 고등학교에서 반장도 하고 친구들이랑도 다 친해졌다고 찾아왔습니다. 거기다 수업도 엄청 잘 맞는다고 해요. 00 이야기 듣다 보니 부장님이 더 생각이 납니다.ㅠㅠ 저번주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작년에 속 썩이던 남학생들도 엄청 찾아왔습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엄청 하고 갔습니다. 부장님을 그렇게 찾더라고요."


"부장님, 보고 싶어요. 저희 방학했어요. 만나러 가도 될까요?"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질병휴직한 나에게는 병원 가는 날, 안 가는 날의 구분만 있던 날들이었다. 그런 나에게 작년에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이 연락해 왔다. 한 명은 작년 신규, 한 명은 작년에 2년 차였던 선생님들이다.

사람 만나는 걸 꺼리고 있었는데 그 선생님들 연락을 받고는 이상하게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보자고 답했다. 이런 마음의 변화가 스스로도 놀라웠다. 유방암 수술, 방사선치료의 표준치료 일정이 끝나서 그랬을까? 난소낭종과 자궁적출수술 날짜가 잡혀서 불확실성이 사라져서 그랬을까? 암튼 여러 이유와 더불어 아끼고 아끼던 후배 교사들이 잘 지내는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만나고 싶었다.

이런 쪽지를 남기곤 했다

작년 서이초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지켜주지 못한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후배 교사들이 혼자서 힘들어하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학부모 민원을 혼자 감당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힘든 일 있을 때 의논할 수 있는 선배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마음으로 함께했던 후배교사들이어서 그런지 메시지를 받자마자 내 처지가 어떤지는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에너지가 가라앉아 있어서, 내 처지를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어서 등등 만남을 미루던 이런 이유들이 이상하게 그때는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두 선생님은 우리 집 앞까지 찾아왔다. 두 선생님을 만나자 강제로 삭제했던 시간들이 뭉텅이로 복원되었다.

작년에 그렇게 힘들어하던 아이가 고등학교에 가더니 잘 지낸다는 이야기, 그렇게 속 썩이던 애들이 너무 자주 찾아와 학생부에서 경계령을 내렸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작년의 시간들이 통째로 되살아났다.  암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이 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로 덮어쓰기 되었다.

하마터면 그 아이들 때문에 암에 걸린 줄 알고 그 시간을 지워버리려고 했다. 학교에서 암에 걸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양이니 기를 얻으면 흩어지기 쉽고, 여자는 음이니 기를 만나면 울체가 된다.
여성들의 병은 대부분 이 ‘기의 울체’에서 비롯된다.
‘기울’이 담음으로, 또 어혈과 종양으로 이어진다.
이런 양상은 여교사들에겐 특히 치명적이다.

-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중에서 -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책에서 기가 울체가 되어 종양으로 이어진다는 내용을 보고는, 기가 팔팔해도 너무 팔팔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학교로 다시 돌아간다면 또 암에 걸릴 환경에 노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는 것까지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며 학교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다.


그런데 두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니, 그 아이들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다행히도 완전 삭제가 아니라 어디 보이지 않은 폴더에 저장해두었나 보다.

생각하기도 싫던 학교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유방암은 느린 암으로 암이 걸리게 된 것은 5년 전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이다. 그제야 학교를 범죄자로 낙인찍었던 마음을 풀 수 있게 되었다. 5년 전의 난, 비정상적일 정도로 일중독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땐 내 생활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두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하며,

아이들이 생각나고, 보고 싶은 걸 보니,

난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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