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랑선생 Feb 15. 2024

책 목차는 어떻게 짤까요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에 학급 반장으로 선출됐다. 고3 입시를 앞둔 터라 반장을 하려는 아이들이 부족한 때였다. 카리스마라고는 조금도  없던 내가 반장으로 뽑힌 이유다. 친구 한 놈이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말을 했다. ‘야, 네가 반장 된 걸 보니 학급 말아먹을 일만 남았네.’    

 

 그날 집에 도착하자 엄마를 물끄러미 봤다. 반장으로 뽑힌 걸 말해야 하나. 생각해 보니 이 뉴스를 전하려면 해야 할 말이 많았다. 반장 선거를 한 것/ 반장 후보에 어떤 애들이 있었던 것/ 반장이 되니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이 한 말 등등   생각해 보니 건네야 할 소식이 많았는데 어떤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거다. 고민하다 결론을 냈다. 에이, 엄마한테 그냥 내일 말하자. 


 그러나 그 ‘내일’이 되자 또다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난감해졌고 생각을 거듭하다 다음 날로 미뤘다. 결국 내일은 모레가 되었고, 그 모레는 며칠 후가 되었다. 그런 식으로 한 학기가 지나갔다. 2학년 말 겨울방학 무렵이었던가. 같은 반 친구 엄마의 전화를 받은 뒤, 그제서야 엄마는 알게 되었다. 작은 딸이 학급 반장이 되었단 걸. 적잖이 당황했겠지만 엄마 역시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엄마를 닮았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내 생각이나 상황을 말로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머릿속이 늘 복잡하게 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덩어리로 존재하는 생각의 뭉치를 살살 풀어 말로 표현하는 게 내겐 큰 난제였다. 강의나 강연은 준비를 열심히 하고 경험을 쌓으면 체계적으로 말할 수 있으니 예외로 치겠다. 관심 분야에 대한 이야기도 평소 생각을 정리해 놓는 편이니 나름 체계적으로 건넬 수 있지만, 내 근황이나 상황을 입 밖으로 꺼낼 때는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곤 한다. (말하기 귀찮아서 아예 입을 다물거나 다짜고짜 본론부터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누군가 날 과묵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건 큰 착각이다. 신중하고 사려 깊어 그렇다기보다 생각은 너무 많은데 그 덩어리를 말로 풀어내지 못해 그런 거다. - 또는 타인의 일에 큰 관심이 없어서 그렇기도 - 누군가 날 겸손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 역시 착각이다. 스스로를 자랑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으나, 그 자랑조차 비체계적으로 할 게 뻔히 예상되어, 그냥 말을 않고 입을 다무는 거다. 그래서 나는 말보다 활자로 이야기를 풀어 쓸 때 조금 더 안심한다. 활자는 실시간으로 내놓는 게 아니라 수없이 다듬고 고친 후 꺼내도 되니까.     


   책도 마찬가지다. “내 인생 풀어내면 책이 한 권이야!”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많다. 그런데 그 인생과 생각의 뭉치는 덩어리로 존재하면 책이 되지 않는다. 목차로 일단 풀어내야 한다. 책은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 건네는 긴 편지 같은 거니까. 실타래를 살살 풀어 목차부터 전하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를 설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차를 짜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책의 목차를 짜는 방법


 1) 각 꼭지의 소재 ---> 대주제(책의 각 챕터)로 묶기     


 첫 번째는 각 꼭지가 될 만한 글감(소재)들을 쭉 나열한 다음, 그 꼭지를 몇 개의 덩어리(대주제. 하나의 챕터)로 묶는 방법이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작은 글감들을 큰 주제로 묶는 방식이다.  


 가령 돈가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에 관련된 에세이 책을 쓴다고 생각해 보자. 먼저 내가 활자로 옮길 수  있는 에피소드나 글감을 부담 없이 나열해 본다. 매운 돈가스 집에 방문해 큰코다쳤던 기억,  경양식 돈가스 가게에서 느낀 점, 돈가스를 튀기다가 손을 다쳤던 일, 돈가스가 나에게 행복을 주는 이유, 돈가스 맛을 결정하는 것, 어릴 때 엄마가 해준 돈가스의 맛, 직장생활과 관련된 돈가스의 추억 등 이러저러한 에피소드가 생각날 것이다. 모든 글감을 한 꼭지로 삼아 책을 쓸 수 있다(물론 이런 책을 한 권 쓰려면 돈가스를 아주 많이 좋아하든지 관련된 느낌이나 통찰을 잘 엮어낼 수 있는 게 좋다. 에세이의 경우 30~40 꼭지까지 필요한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열한 에피소드나 글감 중 공통적인 속성을 발견해 몇 개의 덩어리로 묶으면 된다.  가령 돈가스 가게에 방문했던 에피소드만 모아볼 수 있다. 매운 돈가스 집에 가서 느낀 인생의 매운맛이라든가, 오랜 전통의 경양식 돈가스 집에서 느낀 점은 같은 카테고리(예컨대 ‘돈가스 덕후의 돈가스집 순례기’ 뭐 이런 식의 대주제 제목으로)로 묶어 한 챕터의 제목으로 삼을 수 있다. 책의 목차는 대략 이런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챕터1. 돈가스 덕후의 돈가스집 순례기  
  - 매운 돈가스 집에서 느낀 인생의 매운맛
  - 경양식 돈가스 집의 전통이 주는 의미
  -.......

 챕터2. 돈가스에 얽힌 추억(대주제)
 - 어릴 때 엄마가 해준 돈가스의 맛
 - 직장생활과 관련된 돈가스의 추억
 -.....  


 내가 집필한 그림 에세이인 <그림의 말들> 역시 이런 식으로 목차를 구성한 책이다. 이 명화에세이는 내가 브런치에 연재했던 글 28 꼭지 정도로 처음 구성되어 있었다 (책으로 될 거라 생각지 않고 글을 썼으므로 산발적으로 주제가 흩어져 있었다). 책을 위한 목차를 구성하려 생각해 보니 이 28꼭지 주제를 대략 네 개의 챕터로 나눌 수 있었다. (1) 자아탐구 (2) 인간관계 (3) 마음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 (4) 인생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 이렇게 네 챕터로 크게 나누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글을 정리했다.

<그림의 말들>은 대략 이런 식으로 큰 챕터를 나누고 각 챕터 제목을 지었다 (책 속 챕터 제목은 편집자님이 붙인 것)




2) 큰 주제 ----> 하위 주제로 나누어 글감 생각하기


 반대로 대주제를 정한 다음 거기에 맞는 내용을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 나는 주로 경제나 인문사회에 관련된 책을 많이 쓰기 때문에 이 방법을 주로 쓴다. 내가 집필했던 청소년 인문사회 교양서  <이 장면 나만 불편한가요>라는 책의 경우 전반적으로 미디어 속 차별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 하위 주제를 ‘기회의 불평등/ 양성평등/ 사회적 소수자 차별/ 빈부 격차/인종차별/외모차별’ 등으로 목차를 짜고 거기에 맞는 글감이나 내용을 집어넣는다. 가령 빈부격차에 대해 다루는 꼭지에서는 ‘임대주택에 대한 차별적 단어 사용에 관한 이야기, 미디어 속 빈곤 포르노의 문제점, 금수저 연예인 기사 속에 숨은 이야기’ 등의 소재를 집어넣어 원고를 집필했다.


<이 장면 나만 불편한가요> 책의 목차 (이 역시 책 속 챕터 제목은 편집자님이 붙인 것) 




 특히 자기 계발서나 특정 문제를 다루는 인문서의 경우 원인과 문제, 결과를 살펴보는 식의 목차를 짜는 게 좋다. 교권침해에 대한 내용을 인문서나 사회 비평서로 다룬다고 해보자. 이 경우 ‘교권침해가 나타나는 현재의 실태 – 교권 침해의 원인 분석 – 교권침해의 해결 방안 찾아보기’ 순으로 대주제를 짜볼 수 있을 것이다.

 

3) 단어나 문장이나 문구/ 날짜나 기념일 등을 중심으로 목차를 짜는 경우


  낱말이나 짧은 문장이나 문구, 아포리즘을 넣고 거기에 해석이나 체험을 곁들여 쓴 에세이나 인문서도 많다. 예전에 말한 바 있지만 글쓰기에 대한 책인 은유 작가님의 <쓰기의 말들>의 경우,  유명한 작가나 문장가들이 글쓰기에 관련해 남긴 명언이나 문구를 먼저 쓰고 거기에 대해 작가님의 생각이나 글쓰기 팁, 깊은 통찰 등을 엮어 쓴 에세이다.


 최근에는 달력처럼 기념일이나 날짜를 정해 짧은 챕터의 글을 쓰고 이걸 엮어 책으로 내는 경우도 많다. 하루에 1분 이내로 공부해야 할 경제단어를 하나씩 보는 구성(이 건 내 책의 깨알 홍보)이나, 명화를 하루에 한 편씩 살펴본다거나 UN기념일을 통해 지구환경에 대해 공부하는 책도 있다. 매일매일 하나씩 짧은 교양을 쌓는 인문서도 많이 나온다. 최근 들어 짧은 챕터의 글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져 연초면 일력 형태의 책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미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런 구성은 그 자체로 책의 독특한 기획이 될 수 있다.      



목차의 제목 짓기


 목차를 대략 정했다면 각 꼭지나 목차의 제목을 짓는다. 원고투고를 했을 때 목차의 제목이 매력적이라면 출판사도 해당 원고를 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인문서나 과학서의 경우에는 독자의 호기심이나 관심을 유발하는 제목을 짓는 것도 방법이다. 작년에 역사와 경제를 연결 짓는 <타임라인 경제교실>이라는 경제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 안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발표’에 관련된 꼭지가 있었다. 이 경우 제목을 그대로 적는 것보다 ‘자본주의의 라이벌, 공식 데뷔하다’라는 제목을 붙이는 게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다. (<공산당 선언>은 사회주의 사상의 정신적 지주가 된 책이니 붙인 제목이다)  또는 <공산당 선언>이 매우 얇은 책자였다는 데 착안해 ‘23쪽짜리 얇은 책이 세계의 역사를 뒤흔든 이유’ 식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제목을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호기심이나 관심을 유발하는 제목을 짓기 위해서는 평소 유튜브 동영상이나 인터넷 기사를 보고 흥미로운 제목을 많이 살펴보고 연구하는 것도 좋다.


에세이는 책의 감성을 잘 드러내는 제목, 또는 감각적인 제목을 붙이는 게 좋다. 글의 제목을 ‘매일 꾸준히 글을 쓰는 이유’로 정했다고 생각해 보자. 글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에 좋은 이름이다. 그러나 에세이의 경우에는 ‘오늘은 오늘의 글을 써요’ 정도로 제목을 붙이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목차는 내 생각의 덩어리를 조심스럽게 잘라 독자에게 건네는 일이다. 그 자른 조각에 잘 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늘 그렇듯 책을 쓰는 일에도 연구가 필요하다.

     


글쓰기의 작은 팁
 
1. 원고투고를 할 때 기획안에 넣는 목차가 중요하다. 편집자는 목차를 보고 책의 얼개를 대략 상상해볼 수 있다. 목차를 보고 책이 될 만한 원고를 골라내기도 한다.

2. 내가 쓰고자 하는 책이 있다면 비슷한 카테고리의 유사도서를 찾아보고 그 책의 목차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게 좋다.

3. 자기 계발서나 인문서, 과학서 등의 경우에는 목차의 체계성이나 논리성이 더 중요한 편이다.

 4. 에세이의 경우 목차의 제목을 책의 감성이 잘 드러나게, 또는 감각적으로 짓는 게 좋다.

5. 목차를 짤 때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도 좋다. ‘이러이러한 책을 쓰려고 하는데 목차를 어떻게 짤까’라고 물어보면 도움을 주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자신의 원고 스타일에 맞게 본인이 그걸 가다듬는 과정도 필요하다)               



덧.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어제 제가 저녁까지 회식을 해서 오늘 새벽부터 급하게 글을 써서 올립니다;;;;


 목차 짜기와 제목 짓기는 책 쓰기의 뼈대를 잡는 것이라 생각보다 중요한 작업이에요. 출간 계약까지 맺은 후라면 편집자분들이 해주시는 경우도 꽤 있지만, 원고 투고를 하거나 책쓰기를 시작하는 분이라면 직접 목차를 짜고 제목을 지어야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 )

  

다음 주에는 오랜만에 이 브런치북의 연재글 대신  <무미건조한 위로><아무거나 3분 교양> 매거진에 글을 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글은 2월 22일(목)에 발행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유랑선생 인스타그램




이전 12화 오늘은 오늘의 글을 써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