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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Jan 25. 2024

평범함도 재능이 될 수 있을까

글쓰기에 '나의 평범함'을 활용하는 방법 

“너 뭐 돼?”라는 유행어가 있다.  불필요한 상황에 끼어들거나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대략 ‘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니?’내지는 ‘네가 특별한 뭐라도 된다는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거냐’라는 긴 문장을 3음절로 짧게 축약한 말일 테다. 


이 말의 맥락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뭐'라는 단어에 꽂혀서 엉뚱한 생각을 이어 본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그 '뭔가'가 되고 싶지 않을까. 눈에 띄고 특별한 무언가가.      





  특별한 시선을 받고 싶던 때가 있었다. 대학 시절과 연합 엠티 자리였다. 저녁 식사나 장기자랑, 레크리에이션 따위의 시간이 끝나면 한밤 중 술자리가 이어졌다. 내 기억에 그 술자리의 특별한 이들은 캠퍼스 커플들이었다. 가만히 보면  CC들은 정해진 행동 패턴이 있었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 본인들끼리 귀를 맞대고 소곤대며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둘이 바깥으로 슬그머니 나가서 산책을 하고 들어온다. 다들 그 외출 장면을 안 보는 척하면서 슬쩍 지켜봤다. 또는 ‘어어, 둘이 나가네!’라며 알은척을 하거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 모습이 부러웠다. 내 생각에 술자리에 주야장천 머무르는 것보다 슬그머니 일어서 그 자리를 떠야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나도 누군가와 눈빛 교환을 하고 무리의 시선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고 싶었다. 서늘한 밤공기와 대화를 즐기며 바깥 산책을 하고 싶기도 했고. 

     

그러나 나는 대체로 술자리의 막판까지 자리를 지키는, 성실한 학과의 일원이 되곤 했다. 과 선배 한 명이 온몸으로 뱉어내는 주사를 바라보거나 도돌이표처럼 비슷한 주제로 이어지는 술자리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의문을 던지곤 했다. 어째서 나는 소주와 맥주의 연합 공격에도 맨 정신을 유지하는 사람인 건가. 왜 이 지루한 술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일원이 나인 걸까. 어째서 무리의 시선을 받으며 밖으로 나가는 입장이 아닌 걸까. 비슷한 생각을 학과 MT를 갈 때마다 했지만, 짧은 순간 특별해 보이려고 누군가를 사귈 순 없었다. 이런저런 사정도 있어서 결국 4년 내내 캠퍼스 커플이 되지도, 술자리를 뜨는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         




 20대 중반 직장 생활 이후로는 상황이 역전됐다. 특별한 시선을 받지 않는 게 유리한 점이 됐다. 내가 평범하고 무난하며 어디서도 튀지 않는 사람이란 사실에 안도했다. 조직생활(특히 내가 속한 조직은)에선 너무 튀면 불리한 상황이 올 수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에. 


 고백건대 나 역시 모든 면에서 무난하고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마음 가장 밑바닥에 또라이 하나 정도는 품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특이하거나 특별하다 느껴지는 구석은 꾸깃꾸깃 접어서 주머니에 집어넣고 사람들 앞에서 절대 펼치지 않는 타입이었다. 무리에 속하는 게 안전하다 생각했으니까. 정규분포 그래프의 정가운데는 아닐지라도, 끄트머리에라도 속한다고 느껴야 안도하곤 했다. 


 그 일련의 노력으로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남들과 비슷한 리액션과 제스처, 적절한 눈치. 노력의 결과는 아니지만 평범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니 어려운 게 없었다. 사회생활하면서 나는 늘 그게 스스로의 장점이라 생각했다. 튀지 않고 무난하며 상식적이고 건실한 사람. 이따금 특별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질투나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대체로 ‘선 안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게 내 작은 자부심이었다. (훗날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런데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 이따금 내 평범함이 미워지곤 했다. 그 평범함이 글쓰기에 걸림돌이 되지 않나 생각될 때마다. 평범함은 ‘재능의 결여'를 뜻하는 말 아닐까. 특별한 경험이 없다는 건 글쓰기의 거대한 약점 아닌가. 의구심에 휩싸일 때도 있었다. 평범한 내가 무슨 글을 쓴다고. 당시엔 평범함보다는 특별함을 움켜쥔 인간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범함도 재능이 될 수 있단 사실을 안다.  


 나는 평범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대다수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희로애락(喜怒愛樂)과 오욕칠정(五慾七情)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인간이다. 덕분에 평범한 사람들의 욕구와 갈망, 슬픔과 기쁨을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내가 슬픔에 빠지는 구간은 다른 사람도 슬퍼하는 지점이다. 내가 기쁨을 감지하는 구간에서 타인들도 기뻐할 때가 많다. 덕분에 독자의 반응을 예측하며 글을 쓸 수 있다. 이 구간에서는 사람들이 키득거리겠구나. 이 구간에서 사람들이 슬퍼하겠구나 정도의 예측이다.   


  특히 에세이를 쓸 때 ‘나라는 인간의 보편성’을 믿으며 글을 쓴다. 세상에는 특별함을 기반으로 훌륭한 글을 쓰는 글쟁이도 많지만, 내 경우 이쪽이 맞다. 그리고 알고 있다. 나처럼 외로움에 떨다가도 24시간 누군가와 있으면 제발 혼자 있고 싶다고 소리치는 사람, 디지털 디톡스를 외치다가 갑자기 5분 만에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는 사람이 세상에 적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자기 성장을 해야 한다며 소리치다가 게으름에 빠져드는 인간이 제법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잘 나가는 모습에 이따금 배 아파하다가 내 그릇은 왜 이다지도 간장종지만 한 걸까 되뇌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존재할 거라 믿는다. 대다수 사람들이 나처럼 적당히 정의로우면서도 적당히 비굴하고, 똑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석을 거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글을 적는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탐구심을 채우며 글을 쓰기에도 스스로가 평범한 쪽이 낫다. 에세이를 쓸 때의 나는 '나'라는 인간을 관찰하고 탐구하고, 그 탐구 결과를 활자로 풀어낸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스스로를 관찰하면서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나 행동 패턴을 발견할 때 희열을 느끼곤 한다. -내 글쓰기의 주요한 즐거움 중 하나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관찰대상(표본)이 보편적일수록 넓은 범위에 적용 가능하니, 내가 평범한 편이 차라리 유리하다. 관찰과 탐구의 결과를 에세이로 풀어내면 독자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니 일석이조라 볼 수 있고.     





 지식글을 쓸 때는 ‘평범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이 뭘까’에서 시작해 보는 것도 괜찮다. 사람들은 다양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유튜브에 뜨는 '다이소 꿀템 목록'이나 '돈 많이 번 K팝 아이돌 순위' 같은 걸 궁금해하기도 하겠지만, 좀 다른 카테고리의 호기심도 가지고 있다. 가령 ‘똥이 담긴 통조림으로 만든 예술작품이 있다’는 제목의 글을 보면 ‘똥’과 ‘통조림’, ‘예술작품’이라는 낯선 연결에서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해외에 가서 맥도널드 매장 마크를 보고 안도감을 느낀 경험이 있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글이나 영상을 클릭해보고 싶을 것이다. 

      

 더 궁극적인 호기심을 품게 되는 경우도 있다. 왜 5분짜리 유튜브 영상도 1.5배속으로 보는 현대인들이 늘어나는 건지, 전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릴 만큼 식량 생산량이 넘쳐나는 데도 어째서 세상의 절반은 여전히 굶주리는지, 더 깊숙한 이유와 해결책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의문은 글이나 책의 좋은 주제가 될 수 있다. 

   



평범함을 주제로 글을 실컷 늘어놨지만 평범하다거나 특별하다는 사실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게 내 근본적인 생각이다. 모든 사람은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하고,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존재니까. 그러니 때에 따라 스스로의 평범함과 비범함, 보편성과 특수성을 잘 꺼내어 활용하는 게 좋다. 특정한 카테고리에 날 욱여넣고 고민하는 것보다 상황에 맞게 내 특성을 잘 활용하는 게 포인트다. 


        

글쓰기의 작은 TIP

1. 특별한 이야기처럼 평범한 이야기 역시 글이나 책이 될 수 있다. 다만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마음에 공감할까’ ‘보통의 사람이 어떤 이야기에 호기심과 관심을 가질까’란 질문을 던지는 게 글쓰기에 조금 더 도움이 된다.

2. 인간이 보편적으로 기쁨과 슬픔을 어디에서 느낄까,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에 좌절하나 등에 관심을 두고 나와 주변을 관찰해 보는 것도 좋다. 가령 내가 직장에서 화난 이야기를 에세이에 풀어놓는다고 할 때 그 에피소드를 통해  직장인의 애환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이 애환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그 생각을 활자로 펼쳐내면 공감과 위로를 주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독자들은 독보적인 사람이나 전문가의 특별한 이야기와 가르침을 원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비슷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3. 평범한 사람들의 공감과 깨달음을 잘 관찰하고 쓰면 좋은 에세이가 되고, 평범한 이들의 자기 성장 욕구를 캐치해 내 글로 엮는다면 자기 계발서가 된다. 평범한 사람의 지적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건드리는 글을 쓰면 매력적인 지식 콘텐츠가 된다.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평범함과 특별함, 재능에 대한 글을 써보았어요. 저는 평소에 공감이나 위로에 기반한 에세이를 많이 쓰기 때문에, 그것에 관련한 내용을 담기도 했고요. 


공감이나 위로를 주고자 하는 글, 가독성이 높은 텍스트를 쓴다 해도, 제 경우엔 머리를 많이 굴리고 주변을 관찰해서 글을 쓰는 쪽에 해당합니다. 사람마다 성향도 다르고 쓰는 글의 성격도 다를 수 있으니 답도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시는 게 좋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다음 글은 2월 1일(목)에 발행합니다.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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