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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Feb 29. 2024

글쓰기 막힘 현상을 돌파하는 방법

한 챕터를 무난히 채우기 위한 비법

 첫 원고 투고를 준비할 때의 일이다. 미술과 경제를 콜라보한 청소년 원고를 야심 차게 기획했다. 일을 먼저 벌이고 뒷수습을 하는 나는 기획을 세우자마자 샘플 원고 작성에 돌입했다. 200자 원고지 분량으로 30매 정도를 채워 출판사에 보내는 게 당시의 내 목표였다.


그래 그까짓 거 금방 채울 수 있겠지. 큰 그림이 서 있는데 A4 몇 장 채우는 게 어렵진 않을 거라 자신했다.  머릿속 구상으로는 활자로 멋들어진 도시를 펼쳐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근사한 빌딩과 고풍스러운 옛 건물, 사람들로 들어찬 거대한 도시와 같은 글 세계를 지을 거라 믿었다.


 예비저자의 오만함은 흰 여백을 마주하자마자 사그라졌다. 나는 첫걸음부터 서투른 글쟁이였다. 경제와 관련된 미술작품을 선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뒤샹의 샘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하다 막혀 중도에 포기했다. 반 고흐의 그림을 첫 소재로 삼고 흰 여백을 채워나가다 멈춰 섰다.  활자로 펼쳐낸 내 세계에는 거대한 아파트도 빌딩도, 고가도로도, 사람도 없었다. 초가집 한 채만 덩그러니 놓인 빈약한 세계였다.  


 한참의 고민 끝에 첫머리에 쓸 그림을 고르긴 했다. 존 콜리어의 <고다이버 부인>이라는 작품이었다. (내 첫 브런치글의 소재가 된 그림이기도 하다) 세금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채워보자는 계획도 야심 차게 세웠다. 그러나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오는 데에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A4의 절반 채우는 것에도  끙끙댔기 때문이다. 일관성 있는 주제로10페이지 넘는 글을 쓰는 게 몹시 어려운 일임을 처음 알았다.


결국 끙끙 앓으면서 샘플원고를 전부 쓰는 데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여기에 더해 출간기획서를 완성해 출판사에 투고를 하는 데에는 2주가 더 걸렸다.

이전에 올린 적 있지만 첫 원고투고를 할 때 내가 출판사에 보냈던 원고다. 존 콜리어의 <고다이버 부인>을 소재로 글을 썼었다.


 글 쓰는 경력이 몇 년 쌓인 지금은 다를까.  날 때 입에서 노랫가락 흘러나오듯, 손가락 사이로 글이 술술 쏟아진다면 참 좋겠지. 그러나 가끔은 글을 쓰다 턱 막히는 느낌에 부딪히곤 한다. 변비 걸린 것처럼 유독 글이 풀리지 않는 시기가 있다. 이 즈음이면 흰 여백에 한 줄 내뱉는 데에도 서너 시간이 걸린다.  A4 반 장도 채우지 못한 채 카페에서 죽치다 집에 오는 날이 있다. 그 무거운 귀갓길에는 온몸이 아파온다. 아무도 날 때리지 않았는데 활자에 얻어맞은 기분이 들어서.





 특히 책을 위한 원고를 쓰는 경우 마감의 존재가 양극단의 문제가 된다. 마감은 글을 쓰기 위한 활력소가 되기도 하지만 부담을 가중시킬 때도 있다. 출판사 투고를 위해 원고를 쓴다면 풀리지 않는 글에 조바심이 날 수 있다. 출간 계약을 해서 편집자에게 글을 넘기는 상황이어도 마찬가지다. 마감에 가까워질수록 채우지 못한 흰 여백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편집자의 성난 얼굴이 떠올라 두려움에 떨 때도 있다.  


글이 막혀 진퇴양난, 망망대해에 놓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근본적인 대책은 글이 술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일 테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다음의 임시방편을 쓰기도 한다.   



글쓰기의 예열

 

 글쓰기는 요리의 과정과 비슷하다. TV 속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잘 준비된 재료를 냄비나 프라이팬에 넣고 끓이고 조리하는 매끄러운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 요리에서는 준비와 예열 시간이 필요하다. 재료를 자르고 다듬는 과정, 적당한 온도에 맞춰 물을 끓이고 프라이팬을 달구는 절차가 필요하다. 글도 마찬가지다. 재료(글감)를 넣어 끓이고 볶아 글을 내놓기 위해서는 예열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 경우, 집필하는 책은 대다수 사회나 경제에 관련된 지식을 다룬 교양서다. 지식글을 쓸 때는 예열의 시간을 대부분 자료 조사로 채운다. 특히 글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구글에 들어가 관련 기사나 법률을 부지런히 찾아본다. 구글이 다른 사이트에 비해 자료가 많고 논문이나 흥미로운 신문 기사도 많이 검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미술 글을 써야 할 경우 작품을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한다. 미술사 책을 둘러보거나 명화 모음 사이트인 위키아트(Wikiart)나 아티브(Artvee) 등의 사이트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 이 사이트에서 저작권이 만료된 명화 그림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도 있다.)



왼쪽은 원고 관련 기사를 찾아서 공유해 놓은 '나와의 채팅방' 화면이고, 오른 쪽은 명화 모음 사이트인 Artvee의 첫 화면이다.

 

 에세이는 예열 방법이 조금 다르다. 나는 주로 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방 안을 걷는 방식으로 몰입의 시간을 갖는다. 사고를 유연하게 만들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최근엔 유튜브에서 음악을 찾아 듣는데, 위험성도 있다. 유튜브 첫 화면을 클릭했다가 숏츠 도파민 지옥에 빠지기도 하니까. 유튜브와 모바일 게임을 클릭하면 글쓰기 예열 시간은 죄다 날아간 거라 보면 된다.


  특히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 글을 발행할 때는 듣는 음악도 달랐다. 당시 글 발행을 화요일마다 했는데 그날이면 빠른 템포의 음악, 신나는 댄스곡은 멀리 했다. - 나는 원래 아이돌 댄스 음악 마니아다-  대신 적당히 느릿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곡, 따스하지만 씁쓸한 선율의 음악을 즐겨 듣곤 했다. (글쓰기 노동요로  백예린의 Lalala love song이나 콜드의 마음대로를 많이 듣던 기억이 난다. 가끔은 에디 히긴스가 연주한 Autumn leaves를 듣기도 했다.)   


  물론 마감의 압박에 시달릴 때는 이 모든 게 시간낭비로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뭐 하자고 이 짓을 하고 있나, 이런다고 글이 써지는 건가 등의 의문문이 찾아올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예열의 중요성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준비의 과정이 부족하면 글도 설익을 수 있으니까.



조각보 글쓰기


 어느 날 편집자분을 만나 들은 얘기다. 첫 출간 계약을 한 저자가 있었다. 200자 원고지  600매를 채워야 하는 원고였고, 처음에는 저자도 자신만만했다. 시간이 지난 뒤, 300매에 멈춰 선 저자는 집필의 어려움을 하소연했다. 도무지 분량을 채울 자신이 없으니 300매로 책을 내면 안 되냐는 부탁도 이어졌다.


 마냥 남 얘기로만 들리지 않았다. 나도 가끔 비슷한 어려움에 빠진다. 원고의 주제와 뼈대를 신나게 세웠고, 예열 과정을 충분히 거쳤음에도, 한 챕터 채우는 게 막막할 때가 있다.


  전체 분량이 원고지 700매 정도 정도이고, 35 챕터로 이루어진 에세이 원고를 쓴다고 생각해 보자. (물론 요즘에는 에세이 원고의 분량이 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챕터별 분량이 고르게 채워져야 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평균적으로 한 챕터당 원고지 20매 정도는 써야 책 한 권이 완성된다. 대개 10포인트 글자로 A4로 2매 정도를 꽉 채워야 나오는 글의 길이다.  그런데 도무지 채우기 어려운 때가 있다. 생각나는 글감이 너무 많거나 부족할 때 이런 문제가 생긴다. 쓰다 보니 글의 방향이 처음의 계획과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책을 위한 원고를 집필하다 보면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이때 나는 조각보 글쓰기란 방법을 쓴다. (이 이름은 내가 명명한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일필휘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쓰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게 이 글쓰기 방식의 주요한 내용이다.  글의 부분 부분을 쓴 다음, 조립이나 조합을 하는 게 그다음 단계고.


 글쓰기를 요리에 비유하는 에세이를 쓴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글을 쓰자면 들어가야 할 내용이 몇 가지 있을 것이다. (1) 요리의 과정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2) 글쓰기의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3) 글쓰기와 요리의 유사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부분도 있을 테고. (4)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나와 주변의 에피소드가 들어가는 것도 좋다.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글 안에 넣을 주요 내용을 모두 적어본다. 그 후 부담 없이 각 주제별로 2~3 단락씩을 만들어본다. 이후 글의 순서를 요리조리 배치하고 다듬고 이어 붙여 글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


나는 글을 쓸 때 이 방식을 자주 쓴다.『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에 실리는 글의 경우 내 에피소드와 고민 - 명화 이야기 - 명화를 통한 성찰이나 결론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매거진에 매주 글을 발행할 때 글쓰기가 버겁다는 생각을 난생처음 해봤다. 명화를 찾는 것도, 명화에 맞는 고민이나 메시지를 찾는 과정도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글 생각이 나지 않으면 각 부분을 먼저 따로 적었다. 이후 주요 내용을 이리저리 배치하고 이은 다음, 연결이 자연스러운지 계속 보면서 퇴고하는 식으로 내용을 채우곤 했다.


  조각보 글쓰기는 직장인이나 육아를 하는 주부에게도 유용한 방법이다.(내 경험담이다)  글에 오롯이 몰입해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할 시간이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조각보를 먼저 완성하고 그 조각보를 이어 붙이는 식으로 글을 쓰면 챕터가 완성된다.

 



 글이 막혔을 때 여러 가지 비법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다. '처음엔 엉성해도 괜찮다는 마음'  흰 여백을 채우는 게 유독 막막한 날이 있다. 이런 때는 얼기설기 구멍이 있어도 괜찮단 마음으로 첫걸음을 옮기는 게  좋다. 글쓰기의 부담을 덜어내는 게 오히려 글쓰기 막힘 현상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퇴고를 거듭하며 정교함과 집중력을 발휘해도 충분하다. 글쓰기는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딛는, 느릿한 과정임을 기억해 두자.    



p.s. 글쓰기 위한 글감 & 준비 과정은 다음 글을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https://brunch.co.kr/@aring/175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저도 자주 마주하는 '글쓰기 막힘 현상(일명 Writer's Block)'을 돌파하는 몇 가지 방식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이 방법이 모두에게 정답은 아니겠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드리면 좋겠습니다.


 저는 어제야 샘플원고를 편집자님께 보냈어요. 내내 원고 집필과 함께 한 방학이었는데 ㅎㅎㅎ;;; 오늘은 근무의 날이라서 이웃분들 글 찾아가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음 주면 신학기 학을 해요. 모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신학기를 맞아 정신이 좀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2주를 건너뛰고 다음 글은 3월 21일(목)에 올릴 수 있을 것 같단 말씀을 드립니다. (죄송합니다ㅠ) 그리고 아침에 출근하면서 글 발행하는 건 아무래도 큰 무리수라;;;; 앞으로 목요일 저녁이나 그 전날 저녁에 글을 발행할 수도 있어요. 그 역시 미리 말씀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요.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유랑선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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