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동규 <멜랑콜리 미학>, 이야기, 그리고 시

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

by 무기명

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에 멜랑콜리가 녹아 있다. 사랑, 죽음, 예술은 공통된 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존재한다. 공통된 점을 간단히 서술하자면 사랑과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예술에 깊이가 깊어진다. 즉 사랑과 죽음 사이에 예술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디오티마의 말 중 에로스는 빈곤과 풍요 사이와 같은 구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디오티마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사랑은 사이 존재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에로스는 욕망이라는 의미로 뉘앙스가 바뀐다. 사랑은 인간에게만 한정된 게 아니라 돈, 명예 등 다양하게 될 수 있다. 디오티마가 사랑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욕망으로 확대되어있다. 그리고 디오티마가 이항대립의 구조를 만든다. 결론적인 요지는 디오티마가 보기에 사랑은 양극단에는 없다. 양극단에는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사이에 있을 때만 욕망이 일어난다. 심지어 욕망의 방향도 있다. 즉 빈곤에서 풍요로 간다. 이 빈곤과 풍요 사이 팽팽한 기를 사랑으로 볼 수 있다. 아폴론적 원리와 디오니소스적 원리 사이와도 연관된다. 이러한 구조로 사랑과 죽음 사이는 예술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면, 더 깊어지면 예술에 가까워지고 죽음에 가까워질 때도 다른 측면이기는 해도 예술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사랑과 죽음 사이의 팽팽한 기를 잘 조율하는 사람이 곧 Genius와 같이 있는 천재이다. 사람들은 각자 사랑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르므로, 에로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만 해도 6가지의 에로스가 나온 것만 보더라도, 멜랑콜리 또한 각각 다르게 나타나며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검은 담즙과 탁월한 은유가, 칸트는 나르시시스트의 숭고한 고독, 니체는 염세주의가 현존재의 ‘승화’로 반전되는 인식의 매개물, 그리고 프로이트는 병리 현상으로 직접적으로 멜랑콜리커를 언급하기도 하였고 간접적으로 멜랑콜리를 나타내기도 하는 등 철학자마다의 멜랑콜리 또한 다르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눈은 자기현시의 장소이자 자기임을 알리는 ID라는 은유적 표현을 한다. 자신을 공개하기 꺼리는 연예인들이 선글라스를 쓰는 이유 또한 눈을 가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가린다. 더 나아가 잘잘못을 떠나 TV에 나올 때마다 항상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연예인들도 있다. 의리남 김보성, 가수 전인권이 대표적이다. 왜 이들은 항상 선글라스를 착용할까?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을 때 마침 TV 프로그램에서 김보성의 선글라스를 벗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물론 한쪽 눈의 시력이 좋지 않아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했지만 내가 주의 깊게 본 점은 선글라스를 벗자마자 카메라를 향한 강력한 눈빛이었다. 자신은 의리남이고 강한 남자임을 알아주라고 외치는듯한 눈빛이었다. 동시에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있을 때는 파이팅하는 자세, 그의 시그니처 포즈를 하고 있었지만 그때는 오직 눈의 강렬함으로 그의 시그니처 포즈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눈의 자기현시, ID란 은유를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수 전인권 같은 경우에는 의리남 김보성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의 선글라스를 벗은 눈을 보고 “아 이래서 그가 노래할 때나 TV에 나올 때 선글라스를 끼는구나”란 생각을 했다. 그의 눈은 어린 소녀처럼 초롱초롱하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굉장히 맹한 듯한, 초점이 없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노래를 즐겨 들었던 필자로서는 충격적이었다. 노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또한 그의 눈과 매치가 되지 않았다. 전인권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표출하는 노래와 눈의 노래가 어울리지 않아 지금처럼 계속 선글라스를 끼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처럼 눈은 자신의 감정의 창문이며 의사소통 주요기관 중 하나이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자식이다. 상사병의 증상을 예술작품 통해 파악할 수도 있다. 즉 평소에 예술작품에 무감각했던 사람들도 전시회를 가 수많은 영감을 얻고자 한다. 필자 또한 연인과 다양한 전시회를 가고 싶어 했으며 시간만 되면 자주 가려고 한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예술작품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러한 이유를 찾아 예전 경험을 회상해보았다. 여자친구랑 처음으로 전시회에 가는 날이었다. 디뮤지엄 2층에서 볼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조형예술이었다. 작품이 거대하기도 했으며 계속 눈길이 갔던 기억이 난다. 순간 그 작품을 보고 있던 여자친구랑 눈이 마주쳤다. 그 때 나는 그 예술작품에 대한 생각은 잊고 그녀랑 대화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전시회를 가 예술작품을 접하지만 우리는 그것과 항상 함께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사랑하면 예술작품에 다가가는 게 아닐까.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픈 데 도저히 어떤 말로는 표현이 안 되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언어의 한계를 띄어 넘게 해주는 것이 은유이다. 그래서 은유를 수사법의 하나가 아니라, 언어의 본질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사랑에 빠지면 언어의 은유성은 극대화된다. 이런 상황은 사랑 노래나 시에서 잘 나타난다.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은유를 구상하고 더 나아가 운율을 살려 감정을 입혀 아름다운 멜로디로 상대방에게 표현한다.

고백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해 언어로써 고백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백은 상대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런 고백을 과연 말로써, 표현할 수 있을까. 필자는 ‘키스’만이 적절한 고백 방법이라 생각한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고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표현하고 당사자는 동시에 그 감정에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한 ‘키스’가 강압적이라 생각이 든다면 상대방은 아직 사랑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고 그저 일방적 사랑을 한 것뿐이다. 그러니 이는 범죄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즉 진정한 고백은 말, 은유로도 표현하기 한계가 있다. 오직 키스를 통해서 서로의 사랑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주제로 짧은 시 한 편 생각해봤다.



<사탕의 고백>

완벽하다 할 수 있는 너의 눈동자같이

인위적으로 흉내 내지 않는 너의 순수함 같이

그것을 앞으로도 느끼고픈 나는 너를 닮으려 하는

사탕을 또 입안에 머물게 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무리 말해도

오직 이 사탕과의 은유로 끝날 뿐

나는 너를 입안에 머물게 할 수밖에 없다

이 사탕을 너와 함께 나누고 싶다

그것만이 나의 마음을 순전히 왜곡 없이

전해줄 수 있다

키스...

사탕은 나에게서 떠났다

그녀의 입속에 머문 나의 마음은

우리의 미소와 함께 세상에 드러난다.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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