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gloomy sunday>
<글루미 선데이>를 보며 일로나의 아름다움을 여러 방면에서 느꼈다. 그리고 첫 장면, 한스의 식사 장면에서 늙은 한스의 모습을 보며 일로나의 늙은 모습은 어떨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일로나의 손과 뒷모습만 나올 뿐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책에서는 아름다움의 정체가 젊음이지 않을까 추정했다. 아가톤이 에로스는 젊음의 신이라 한 것처럼 사랑과 아름다움의 원천은 젊음이라 보았다.
이 부분에서 어느 정도 동의를 하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예쁘기로 소문났고 공부도 잘하고 전교 회장에다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고 심지어 노래도 잘하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 친구는 항상 웃고 다니며 친구들과도 원활한 관계를 맺었으며 인기가 많았다. 근거는 빼빼로데이 때 수북이 쌓이는 빼빼로와 당시 유행했던 싸이월드 방문자 수로 초등학생 신분으로는 이러한 것이 인기의 근거로서 충분했다. 그 친구와 같은 동네 학원에 다녀 버스를 기다리며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때의 대화 중 지금까지 문득 생각나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 친구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길, “나는 주름이 많아지면 자살할 거야” 그 당시 나의 정신적인 나이로는 버티기 어려운 말이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빨간 스니커즈만 쳐다봤었다. 그녀가 그렇게 학업에 충실하고 친구들과 하하호호하며, 자기 자신의 사랑, 남성적 사랑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생기있는 피부의 부드러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미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늙음, 주름으로 표현한 것인지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4~50대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흔히 “지금은 의리로 버티지”라고 하신다. 예전에는 사랑으로 시간을 보냈었다는 말을 은연중에 하는 것이다. 즉 당시에는 젊었었기에 사랑했고 지금은 의리이거나 아니면 자기복제의 대상 자식들에 대한 사랑으로 버티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젊음을 나누는 기준을 주름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기준을 가질 수 있을까란 의구심이 든다.
라즐로가 말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날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인간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내가 항상 말했잖아. 난 지금 이대로 계속 걸을 거야. 그럼 당신은 쉽게 결정 내릴 수 있을 거야” 안드라스를 향한 일로나의 마음을 되돌리기에 어려움을 느낀 라즐로는 넓은 아량을 베푼다. 사업가적 뛰어난 면모를 가지고 있는 그는 그녀를 완벽하게 잃는다는 두려움으로 일종의 보험을 둔 것이다. 책에서는 이를 내기로 표현했다. 내기라는 표현과 사랑은 어떻게 연결 가능할까 생각해봤다. 어떠한 것에 100% 확신이 있다면 누구나 그것에 대해 확신을 할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다면 나는 확신하지만 다른 사람은 의심할 수 있다. 이로써 내기가 형성될 수 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한다고 하자. 하지만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어떻게 확신을 할 수 있을까. 이로써 사랑은 내기와 연결할 수 있다.
대학 새내기 때 친구들끼리 미팅을 하거나 친구가 소개팅 할 때 내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A가 미팅,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방과 잘 될 것인지 금방 헤어질 것이라고 내기를 했었다. 필자는 미팅이나 소개팅은 인위적인 만남이라 진정한 사랑으로 거듭나기 힘들다고 항상 생각해 금방 헤어질 것이라고 내기를 걸었던 기억이 있다. 역시나 주위 친구 중 지금까지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친구는 보이지 않는다. 위의 내용에 벗어난 것 같지만 사랑을 내기와 과연 비교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며 읽었던 점을 해결하는 경험담이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억에 남는 유명한 말 중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할 때까지 나는 죽지 않아”가 대표적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습을 더 나아가 내가 사랑한 사람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랑으로 불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처럼 플라토닉 러브 또한 달리 말하면 불멸의 사랑, 불멸의 욕망 더 나아가 나르시시즘이라 할 수 있다. 빈곤과 풍요 사이에서 생겨난 에로스는 빈곤에서 풍요로 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또 이는 죽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자식을 낳거나 이름을 남기려고 노력한다. 즉 자기복제, 나르시시즘이 나타난다. 이는 플라토닉 러브의 어두운 면이라 볼 수 있다. 그 당시 의학적 지식에서는 남자의 정자는 정액으로서 눈에 보이지만 여자의 난자는 파악할 수 없어 ‘피’로 파악했다. 그래서 정자를 씨앗으로 여자를 대지로 표현해 오직 씨앗을 위한 양분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이런 남성적 사랑은 자기 복제를 말하며 이는 나르시시즘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타자성은 오직 자기복제로 인식된다. 반면 여성적 사랑은 타자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 이런 사랑만이 미래의 타자를 잉태할 수 있는 타자에게 자신의 피와 살을 건네줄 수 있다.
이런 남성적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책에서는 먼저 서양의 자유 개념에 관해 이야기 한다. 서양의 자유 개념에는 사랑이 빠져 있지만 자기 사랑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즉 타자를 향한 사랑은 빠져 있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타자를 향한 사랑과 자기 사랑은 연결된 부분이 있다.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으면 애초에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자유 또한 없다.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그 대상을 상실한 경우 그 비어있는 공백을 채우기 위한 대상이 특정한 사물이거나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즉 상실한 상대방과 특정한 사물이나 자기 자신을 동일화시키는 과정을 겪는다. 이로써 타자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에 대한 생각을 <극복>을 통해 표현해봤다.
<극복>
너는 나를 지웠다.
그 순간,
눈앞에 번쩍이는 천둥과
두 귀를 찌르는 괴이한 소리
나는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나의 감정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그런 두려움이
태풍과 함께 몰아친다
트라우마라는 병명으로
잠시나마 변명을 한다
나는 너를 본다.
너란 실체는 없지만
내 마음속의 본질로써 잠재된 너를
난 느낄 수 있다
그 이후,
천둥의 반짝이는 윙크와
숭고한 콧소리가 흐른다
잔잔한 너의 미소와 같이...
너는 나를 지웠지만
나는 너를 본다
아니 너를 보는 나를 느낀다
그 느낌이 너를 지웠나 보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