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김동규 <멜랑콜리 미학>, 이야기, 그리고 시

나르시시즘과 자살 그리고 우울

by 무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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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사후 세계를 믿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사후 세계란 죽은 사람들이 사는 곳, 유령들이 사는 곳이다. 즉 과거의 사람들이지만,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살아갈 사람들을 존재하게 한 사람들이다. 이는 또한 자기 존재의 근원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들의 세계이다. 이런 사후 세계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즉 그에게 있어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은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한 믿음이다. 이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을 따라 탈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소크라테스도 인간인지라 그런 사후 세계를 가는 과정이 두려워 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독을 마시고 그 독이 잘 퍼지기 위해 감옥을 이리저리 걸었다고 한다.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한 모습,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소크라테스마저도 죽는 과정에서는 완벽한 모습을 보이기 어렵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 본인도 자기 존재의 근원에 확실성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싶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 밥을 먹기로 했다. 먼저 만나서 어떤 걸 먹을까 고민하던 중 그 친구가 나에게 무엇을 먹고 싶냐 했다. 한결같이 “뭐 아무거나”라고 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너는 식욕이 없냐?”고 했다. 그때 나는 장난스럽게 “식욕도 없고 성욕도 없고 탐욕도 없지만, 물욕이랑 명예욕만은 활활 타오른다.”라고 했다. 물론 그 전 맥락에 따라 이런 말이 나온 말이지만 요즘 따라 물욕, 명예욕에 대한 관심이 부쩍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이처럼 한스는 독일 장교가 되어 자신의 권력을 악용한다. 예전에 자신의 벽을 보란 듯이 깨부순다. 하나씩 깨부수는 동시에 그는 무너진 벽을 밟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한다. 과연 우리는 한스가 가졌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다면 한스처럼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스가 3년이란 시간 동안 어떻게 나치 부대의 장교가 되었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그렇지만 고작 3년이란 시간에 정당한 방법, 과정으로 그런 권력을 누릴 수 있었을까? 추후에 한스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만 수용소에 빼 오는 것을 본다면 어찌했는지 추측할만하다. 이런 권력에 대해 정의를 논한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를 살펴보면 강한 자의 이익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반박하여 국가 내에서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 정의라고 한다. 이 측면에서 한스의 권력을 보면 트라시마코스의 정의에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권력으로부터 사랑을 쟁취하려는 것은 한스의 측면에서는 사랑보다는 질투에 가깝고 이는 소유욕이라 볼 수 있다. 수업시간에도 사랑이 먼저일까 질투가 먼저일까를 주제로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질투로서 사랑이 이루어진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 아니다. 질투는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불안함이 상상력을 거쳐서 체화되는 것이다. 이런 상상력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고 이는 이미 상대방으로부터 한 발짝 멀어지는 행위이다. 즉 불교 천태의 ‘일념삼천설’을 통해 말하자면 사랑이란 선의 세계이고 질투란 악의 세계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다가 질투라는 것에 한 걸음 가기만 한다면 그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즉 사랑에서 방심하기만 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질투가 먼저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순전히 사랑이 먼저여야 한다. 그 사랑이 끝까지 가면 진정한 사랑이고 질투가 오면 그것 또한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이처럼 사랑은 질투는 배척 관계이며 사랑이란 방심하면 안 되고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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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는 나르시시즘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내용을 보면 자기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나약하지 않을 수 없고 자유의 힘이 미약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자기 사랑에서는 타자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힘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나약하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넓게 보면 칸트처럼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칸트의 한계가 <<판단력 비판>> 을 통해 객관성 확보를 하려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객관성을 확보했다고는 어렵다고 본다. 객관성이란 범주에 속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자기 사랑, 타자 사랑을 남성적 자유, 여성적 자유를 통해 사랑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체계적인 논리를 통해 사랑을 정의하고 거기서 더 확장해 타자와의 관계에 적용하게 되면 애초에 사랑 본질을 벗어나 알게 모르게 분열을 일으킬, 잔잔한 바다에 부드러운 날갯짓 한 번으로 커다란 효과를 만들어낸 나비효과와 같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남성적 자유와 여성적 자유에 대한 설명을 통해 나르시시즘의 어두운 면을 더 살펴본 후 이 주제에 관해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서양의 자유 개념에는 사랑이 빠져 있고 ‘자기 사랑’만 있을 뿐이다. 사랑은 남성성을 심각하게 위협에 빠트린다. 결국 남성적 자유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죽을 수 있으며 이로써 나르시시즘에 기초한 남성적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타자성을 배제해 버린다. 하지만 이런 남성적 사랑, 여성적 사랑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다. 주의할 점은 ‘여성’이란 명칭이 성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남성’에 관한 명칭이 ‘여성’과는 다르게 친절히 설명되지 않는다. ‘남성적 자유’ 파트 앞부분에 “남성은 자유를 자랑스레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사랑을 말하지 못한다. 그는 사랑을 말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남성성을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 사랑이 간절한 그리움이고 기다림이라면, 결국 연인의 부재를 채우는 꿈이라면, 이런 사랑의 꿈은 지금까지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되었다.”를 보면 마치 남성에 대해서는 정말 성적인 남성을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 남성적 자유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대 그리스 의학 지식을 토대로 정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부터 지금까지 동·서양 모두 변화하지 않은 한 가지는 ‘사랑’이지 않을까 싶다. 사랑이 뭘까 말하면 당시 사용하는 언어, 은유 등 시대가 다르므로 달리 표현하지만 유사한 방향의 감정일 것이다. 이는 객관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 앞으로 어떠한 기술적 진보가 나타난다고 해도, 마음의 감정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해도 ‘사랑’은 객관화하기 힘들다. 너의 사랑 나의 사랑이 다르며 하루하루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변해간다. 사랑은 고정적일 수 없다. 고정적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가식이다. 우리의 사랑은 이러한 변화를 조율하는, 서양 중세식으로 말하면 전지전능하다. 이러한 ‘사랑’은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랑’을 왜곡하지 않고 조금이나마 진정한 감정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살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 생각이 몸을 살해하는 행위라고 한다. 어렸을 때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할까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생각에 한계가 오자 그럼 나는 언제 어떠한 이유로 자살하고픈 생각이 날까에 대해서 고민해보았다. 결국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을 때 자살을 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살은 나쁜 것일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살은 존재할까? 외적으로 스스로 죽는 것만이 자살일까?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통해 새로운 ‘나’가 탄생했다면 이전의 ‘나’는 자살한 것일까? 책에서는 예술가의 자살은 예술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 본질과는 관련 없겠지만 예술이라는 폭이 커서 관련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자친구랑 대화하다가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물론 우리는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주위 사람들,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어느 정도 공통점을 발견했다. 일단 사람들 모두 기본적으로 예술을 비난하지 않는다. 자신의 예술적 행위를 드러내지 않을 뿐 속 깊이 내재함을 자각하는 순간이 온다. 이를 드러내는 사람만이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 예술적 행위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주위 사람들을 보면 예술이랑 관련 없어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자기는 50세까지만 일하고 나머지는 소설을 쓰고 싶어, 시를 쓰고 싶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한다. 아니면 가끔 채팅을 하는데 자신의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지만 라임을 맞춰가며 적듯이 우리는 이런 소극적 은유를 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모두는 잠재적 예술가이다. 우리는 가끔 살아가다 삶에 지치면 다른 삶을 살고파하는 욕구를 표출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예술로써 제2의 자아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이전의 자아는 자살을 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자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자는 조증처럼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될 수 있다. 즉 정신적 고통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고 싶으면 이전의 자아에서 자살해야 한다. 이를 예술을 향한 자살이라 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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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세상에 홀로 남은 이는 상실의 슬픔을 치유해야 한다. 이는 애도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애도작업이 제도화된 것이 장례이다. 이러한 슬픔은 정상적인 감정이다. 누구나 다 상실한 대상으로 인해 슬픔의 감정을 갖는다. 슬프지 않다면 그 대상에 대한 상실에 대해 자신은 상관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실에 대해서는 어떠한 슬픔이 나올까.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실이란 것이 멜랑콜리로 연결되지 않을까. ‘자살’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앞으로 살아갈 의미가 없는 것 자기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어 모른다는 것,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실이다. 이에 대한 증상은 우울이며 멜랑콜리커가 된다. 이런 우울은 슬픔과 다르게 병리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 또한 애도작업으로 치유 될 수 있을까? 이를 트라우마로 연결해보고자 한다. 트라우마는 자기 방어 기질이 외부의 작용보다 약해서 발생하는 정신적 고통이다. 여기서 외부의 작용이 자신의 마음의 작용도 포함될 수 있다. 마음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도 있듯이 그 정도로 마음의 힘은 강력하다. 그러면 반대로 트라우마는 자신의 마음으로도 치유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내재한 우울은 무거운 추를 달고 바다로 내려가는 것과 같아 점점 깊어진다. 이를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뱀에 대한 트라우마는 뱀을 만져서 극복하는 것과 같이 우울은 우울의 반대로서의 전환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는 사람마다 애도작업에 해당할 수도 안 될 수도 있으리라 추측한다. 즉 우울은 정상적인 감정으로 해결하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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