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이미지의 기원을 사랑과 죽음에서 찾았다. 사랑의 힘을 통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이미지가 제작된다고 말했다. 이런 이미지는 독창적이며 자체에 아우라를 지닌다. 이는 작품을 만든 목적이 이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랑과 죽음과 관련해서 나온다. 반면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이미지가 위에서 말하는 이미지 의미랑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명칭을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임의로 Benefit+Image을 합쳐 ‘비미지’로 지칭하겠다.(실제 발음을 하면 ‘비미지’가 아닐테지만 ‘이미지’와의 연관성을 위해 ‘비미지’로 지칭하겠다.) 이런 비미지는 현대 사회에 대량으로 생산/재생산되는 가짜 이미지이다. 사진은 비미지에 속하지만 이미지의 목적에 부합하는 비미지는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찍은 사진, 이익의 목적이 아닌 사진들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이미지를 대신해서 담은 비미지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비미지들은 예외적으로 현대적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진의 발명으로 비미지의 범람의 시대가 되었다. 이는 곧 기술 발전의 우월성을 말한다. 즉 불교에서 ‘찰나의 순간’을 몇만 분의 1초 등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을까? 아니다. 시간을 아무리 쪼개고 쪼개도 시간은 멈춰있을 수 없다. 이는 제논의 역설에서도 이미 증명되었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도 이런 시간 개념, 멈추지 않는 시간을 통해 다양한 이론이 나왔고 기반이 되었다. 이것을 철학 하지 않은 사람에게 말하면 바로 휴대폰을 들며 반론을 할 것이다. “내 사진첩을 보면 시간이 멈춰있어.” 베이컨이 말했듯, “Knowledge is Power”을 통해 보면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철학, 자연까지 우월함을 보이려 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하지만 우리가 비미지들이 범람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면 희열과 안도감을 느끼듯이 우리는 본능적으로 비미지 사이의 이미지를 더 추구하게 된다. 이로써 이미지의 원초적 의미는 되살아나며 비미지들에 벗어나고픈 사람들을 위한 오아시스가 되어 그 가치를 빛낼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아우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우라를 처음 진지하게 말했던 이는 발터 벤야민이다. 그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현대의 예술작품의 사회적 기능과 미학적 효과가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제기했던 사람이다. 즉 기술복제 시대에 전통적인 예술작품은 아우라의 붕괴라고도 말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아우라는 전통적 예술작품의 일회성·원본성·진품성에서 유래한다. 즉 과거의 예술작품은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했다. 비미지로서 말하면, 이익의 목적이 아닌 초판의 비미지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UFO가 지나가는 것을 찍고 자신의 평생 궁금증이었던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 해소로 인한 카타르시스는 비미지 속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사랑과 죽음, 인간의 유일무이성과 본래성은 아우라의 원천에 해당한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아빠는 내가 여러 명이 된다고 해도 바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또한 신기하게도 유치원 때 큰 무대에 나가서 객석을 바라보는 일이 있으면 바로 부모님을 찾아 해맑게 인사할 수 있었다. 부모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처음 본 사람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즉 부모님의 아우라를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은 순간적으로 오직 부모님만을 기억하며 객석의 수많은 사람에 대해 망각하게 된다. 이처럼 사랑은 기억과 망각을 동시에 선사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기억은 망각을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 것은 다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가능해진다. 하지만 망각이 기억이 모두 없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기억된 것이 단지 의식의 공간에서 무의식의 공간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트라우마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잊으려고 해도, 아예 잊고 사는 듯이 살지만 갑자기 어떠한 상황, 예전에 두려웠던 상황에 대한 기억이 잠재되어 있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보고 망각했던 것을 기억해내는 점과 비슷하다. 예술작품의 범주는 넓고 각자마다 예술작품이라 생각하는 기준도 다르다. 그러기에 누군가는 예술작품을 본 적이 없을 것이고 누군가는 매일매일 볼 수 있다. 이는 자신의 감정에 무관심한 것과 무관심하지 않은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즉 자기감정에 예민한 사람이 자기방어 기질 또한 약해 트라우마에 빠지기 쉽다. 이를 통해서 트라우마의 극복을 보면 과연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기억이 없어지지 않는 한,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한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망각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비극의 탄생의 원인 중 하나가 트라우마의 극복을 위한 행위 중 하나와 연관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누군가는 무언가를 잊기 위해, 상실한 사랑하는 사람을 잊기 위한 춤, 노래의 도취를 시작으로 원시 종합 예술, 비극이 탄생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비극에서는 동양식으로 행복해야 하는 인물이 불행에 빠진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즉 그리스의 비극은 운명이 중시되고 탄생과 죽음 사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운명을 자유인만이 어느 정도 운명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유인의 모습을 비극의 주인공을 통해 본다. 이 자유인을 니체 식으로 본다면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 붓다가 말했듯 고로부터 해탈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이를 통해 후대 불교 철학에서는 비실체화만이 붓다가 말한 고로부터의 해탈을 가능하게 한다. 즉 니체도 인간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을 통해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아모르 파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를 이야기하고 또 고대 그리스 비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고대 그리스 비극의 운명, 자유인으로 그의 최종적인 과제, 고통으로부터의 해소를 찾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인간은 사랑과 죽음을 경험할 때에야 비로소 예술과 철학이 눈에 들어온다. 위에서 말한 니체가 비극, 원시 종합 예술을 찾은 것도 다 이러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의 삶에서의 예술은 흔히 비유의 대상이 되는 도토리 하나라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도토리가 적당한 환경에 자라 참나무가 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잠재성을 확인도 못 한 도토리묵이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예술을 다가갈 수 있는 잠재는 내재해 있다. 하지만 예술대학, 인문대학 등 예술을 교과서적으로도 배울 수 없거나 접근하기 힘든 사람들은 예술과 멀어질 수 있다. 모든 것이 예술을 표현한다는 것이라 해도 컴퓨터의 엑셀이 예술이라고는 합리화하기에는 너무 예술과 멀어진다.
한때 자기계발서가 흥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를 위와 같은 자신의 잠재된 예술이란 도토리를 인스턴트 식품처럼 참나무로 만들고 싶은 사람의 욕심이 분출되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즉 자기계발서를 쓸 만큼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발견을 한 사람들을 모방하고픈 생각을 통해 이런 자기계발서가 흥행한 것이다. 결국 이 또한 유행처럼 흐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 서점에 가보면 파스텔 표지를 띠며 황당한 제목을 단 에세이들이 갈대처럼 흔들리며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예를 들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등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거짓말 안 보태고 1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이런 말 하는 게 필자의 속독을 자랑하는 게 아니다. 필자는 철학책을 읽을 때 하루에 한 5장도 못 읽을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하며 책을 읽으려 노력한다. 이런 에세이를 쓴 작가를 나쁘게 말하는 것은 아니라 이러한 종류의 에세이는 자기계발서처럼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며 읽을 수 있다. 물론 그 사람들의 책을 읽어봤지만, 아름다운 문장과 깊숙이 들어오는 공감대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는 우리 안에 있는 도토리에게 영양 성분이 되지 않는다. 선배 중에 철학과를 졸업하시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분의 페이스북 글에서 이러한 글을 봤다. “졸업을 한지 오래되었는데 철학책 말고는 다른 책에 손이 안 간다.” 처음에 그 글을 봤을 때 갑자기 이런 글을 왜 올리는지 생각했는데 ‘멜랑콜리 미학’을 읽고 나니 그 의미를 이제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