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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월이 Jan 08. 2024

친절과 오지랖의 경계
과잉친절의 피곤함

오지랖 :옷의 앞자락. 옷의 앞자락이 넓으면 그만큼 다른 옷을 많이 덮게 되는데 이런 모양새를 남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의 성격에 빗대어 표현한 것.



개인적으로 친절에는 2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맘 편하려고 충분히 의식하며 행하는 행위와 정말 눈치 있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위. 아마 누구나 겪어본 적 있겠지만 오지랖 떠는 사람의 얕은 심성을 진짜 배려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으리라. 불필요하게 나서서 간섭하거나 참견하는 것. 오지랖 떠는 사람들에게 남 이사-라는 말 따윈 존재하지 않는 건지. 세상 관심 있는 건 남의 일, 남의 가정사.

근데 난 악의 없는 오지랖보다 과잉친절이 더 싫다.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근데 과잉친절의 기준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거겠지.



예전 회사에서 같은 팀 가장 연장자(60이 넘으신)인 분이 계셨다. 회사에서 추석선물인가 받아 가는 날 무겁지 않은데 굳이 들어주겠다며 훨씬 어린 사람들 모두를 불편하게 해주셨던 그분의 고집스러운 친절. 

회사 구내식당에서 내가 먹지 않아서 떠오지 않은 국을, 함께 먹는 모두의 국과 반찬을 가득 떠다 날라주신 선임들의 불필요한 친절. 매운탕 못 먹는 사람에게 가장 맛있다는 머릿고기를 가득 덜어주시던 분들(나 말고. 난 뭐든 잘 먹음). 회사에선 간식을 안 먹는 나에게 꼬박꼬박 휴지나 종이에 간식을 나눠주시던 수많은 여성들..


그분들의 오래고 습관적인 친절이 가끔은 폭력으로 느껴질 만큼 싫었던 적도 있음을. 

지금 생각하니 나이대에 따라 친절의 형태도 달라져야 하는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위에 열거한 행동을 윗분들께 했을 땐 대부분 좋아하셨으므로. 

그런데 아마도. 같은 행동이 지금 젊은 층에겐? 



원체 한결같이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 남의 말의 영향력이나 의존도도 약한 편이고, 아무리 친해도 남사는 모양새가 그리 궁금하지 않고, 나사는 모양새도 뭐라 뭐라 해도 별로 스트레스 받거나 하는 거 없이 아무 말이나 맞받아치며 살았다. 아이 없이 사는 것에 대해 양가 어머님보다 작은 어머니나 잠깐 알바하며 만난 스치는 사람들이 더 오만 걱정을 다 보탰는데 우리나라 어른들은 왜 그리 남의 가정사에 걱정, 관심이 많으신지~ 차라리 일할 사람이 적어질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면 할 말이 없겠는데 말입니다.



끈적끈적한 한국의 정-으로 표현되는 오지랖의 남용과 허용

한때 딩크족 카페에 가입했을 때 그 피해의 흔적과 분노들을 참 많이도 보았지요. 

결혼과 출산 문제만큼 참견하기 좋은 일이 또 있으랴~

아. 또 있다. 진학과 취직 문제?



코로나 이후 대학병원에 입원하면서 감염 문제 때문에 다인실에서 모두 커텐을 치고 지내는데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아파서 들어간 곳에서 이런저런 에너지 낭비 없이 제대로 쉬고 나올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오픈된 공간에서 tv 같이 보고, 음식 나눠 먹고, 서로 이런저런 얘기 나누며 친해지고. 

몇 번이나 입원생활한 어머니 덕분에 병원생활은 그런 '피곤한' 만남의 장이었는데.

미용실에서 억지로 얘기 나눠야 하는 것처럼. 벽 쌓지 않고 사람 좋게 어울려야 하는 피곤함.

병문안 차 들린 친정엄마는 '그래도 정 없게 너무 삭막하다'라고 하시더라.ㅎㅎ



또 친절 얘기하다가 내 개인 성향. I 성향을 얘기하고 있구만 그래.


관계는 그리운데 대면 관계의 높은 피로도와 온라인의 공허한 관계 양쪽에서 줄타기하는 Z세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더구나 코로나 때 새 학기를 시작한 세대에 대한 특징을 걱정하면서 (나도 꼰대가 돼가니까요) 그래도 관계의 즐거움을 알아야 할 시기를 그렇게 겪는 데에 대한 우려와 그로 인해 생각지 못하게 발생할 양상에 대해서도 그려본다. 지하철에서 젊은 여성에게 사소한 말을 거는 것조차 무례라고 말하는 중학생 딸 얘기에 정말 각박한 세상이 되어간다고 한탄하던 누군가의 얘기. 

자랑하고 위안 받을 곳은 필요한데, 관계의 무계는 부담스럽고, 사소한 간섭조차 무겁고 피곤해지는 사회

너무 오랫동안 '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들이 많아서 그런 걸 수도. 

이런 과정 또한 어떤 변화를 위한 과도기려니~~~



아마 과잉친절의 피곤함을 느낄 세대도 언젠가는 사라질 테지. 

미래엔 이런 과잉친절을 ARS나 전자기기 VR 음성으로 만 듣게 될 날이 올지 어찌 알겠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되돌아봐야 한다. 나의 행동이 내 기준의 친절이 과잉이나 불편함은 아닐지. 

사는 동안 계속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데로 생각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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