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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온 지 6년 차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포닥 기간 중에 취미를 좀 가져보고자 합니다.

by 하마생각

미국에서는 금요일이면, 사람들은 (심지어 마트에서 계산할 때도), 으레 "Do you have any plans during this weekend?"라는 말을 물어보곤 한다. 나같이 주말에도 별일 없는 사람들은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I don't have any plans."라고 말하면 너무 재미없어 보일까봐, 뭐라도 즐거워 보이는 일을 끄집어내서 대답하곤 한다.


그런데 이번주말부터 "이번 주말엔 뭐 해?"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그리고 꽤 흥미롭게) 답할 수 있는 게 생겼다. 이번 주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학창 시절에는 그림을 배우는 것이 사치로 느껴질 만큼 시간에 쫓겨 사느라, 다니던 미숙학원도 중2? 정도가 되자 그만두었고, 20살 이후로는 몇 번 미술학원에 다녀봤지만, 역시 시간이 부족해서, 또는 돈이 아까워서 꾸준히 다니지는 못했다.


서른 중반이 된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일 아닌 것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는 취미가 필요하다고 느껴졌고, 나는 이내 미술학원이 떠올렸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어떤 화가의 집에서 미술을 배웠던 게 내 마지막 미술학원에 대한 기억인데,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를 지나, 화가 선생님 집에 들어가면 분위기 좋은 재즈음악과 향기로운 커피 향이 났고, 그 분위기 속에서 그림을 그렸던 게 꽤나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미술학원이라면, 미국 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소극적이 된 나도, 용기를 내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구글 검색을 통해, 나는 운 좋게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미술학원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14주 과정 토요일 오후반을 등록했고, (벌써 월요일이니) 저번 주 토요일에 첫 수업이 있었다.


1시인 줄 알고 급하게 갔는데, 알고 보니 1시 반에 수업시작이었고, 덕분에(?) 30분 동안 선생님과 다른 처음온 학생과 이야기도 나누며, 선생님이 어떻게 미술선생님이 됐는지에 대한 역사를 정신이 혼미 해질 정도로 이야기를 나눴고, 1시 반쯤이 되자 나와 다른 4명의 처음온 학생들이 한 반이 되어서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학원의 역사, 앞으로 배울 것 등등), 앞으로 14주 과정 내내 거의 그리게 될 석고상을 골라서 석탄으로 그리기가 시작되었다.


방법은 꽤나 아날로그 적이고 어찌 보면 약간 요상하고 새로웠는데, 석고상을 벽 쪽에 걸어놓고 한 3 발자국 뒤에 그어진 선 뒤에 똑바로 서서, 곁눈질을 뜨고 양팔을 곧게 뻗어서 실을 들어 눈에 보이는 석고상의 길이를 재고, 옆에 캔버스에 그 위치를 옮겨 담는 작업이었는데, 처음에는 눈이 가물가물해서 내가 그어둔 선이 잘 안 보여서 헤매었고, 그 다음에는 손이 바들바들 떨려서 헤매었고, 또 집에 갈 때가 되자 배고파져서 집중력이 흩어져서 헤매다가 결국 석고상의 네모 테두리와 그림자 위치를 조금 따고 2시간 반 수업이 마무리되었다. 수업 후 나를 포함 학생들은 '와 재밌었다!' 이런 느낌이 아니라, '와 다음에는 근력운동 좀 하고 와야겠다.' 이런 분위기였다. 하하하.


아무튼 빠르게 빠르게를 선호하는 한국인으로서는, 굉장히 느리고 불편한 방법의 수업이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한 시간 넘게 석고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내가 언제 전자기기와 완전히 분리되어 한 곳에 이렇게 길게 집중한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고, 그 자체로 힐링되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주말에 할 일이 생기니, 그래도 다음 주말이 기대가 된다. 그리고 일과 완전히 다른 성격의 활동을 하는 것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포닥하면서 내 그림 그리기 실력도 성장이 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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