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감사함에 마음이 뜨끈해질 수도 있다는 것
박사를 졸업한 학교에서 포닥을 한 지 2주 차가 넘었다.
지난 주말에는 이사한 집에 가구를 조립하느라 브런치 글을 못썼다.
변명을 해보자면, 지난주 토요일에 이케아에서 주문한 가구가 한꺼번에 도착했는데, 모두 조립식 가구이기 때문에 주말 내내 하나하나 조립했다. 웃긴 건 조립하다가 코피가 났는데, 코를 틀어막고 계속 조립했다는 것이다..! 가구조립.. 만만치가 않다. 또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은 중노동의 시간이었다.
아무튼 지금까지의 상황을 기록해 보자면 감사하게도 so far, so good이다.
일적으로 보면, 일단 만족스러운 것이, 이미 RA 하면서 교수님의 스타일을 파악해 놨고, 교수님 자체가 일하기 편한 스타일(일의 목표를 clear 하게 공유하고, 중간중간 회의로 checkup 하고 진행하는)이고, 항상 언제든지 질문하라는 그런 느낌이기 때문에, 박사 때 집중했던 분야가 아님에도 연구를 진행하는데 많은 부담은 없다. 오히려 포닥에서 연구하는 주제가 더 science-based이기 때문에 공부할 것이 많고, 최신 방법론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다라던가 어떤 연구를 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표는 없지만, 일단 지금은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꼼꼼하게 연구해 봐야겠다.
생활적으로도,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데, 그 큰 몫을 하는 것은 집인 것 같다. 일부러 박사시절 내가 공부하러 자주 가던 카페 가까이에 집을 구했는데, 박사시절 학생들이 주로 살던 아파트와 다르게, 대마냄새도 안 나고, 깔끔하게 건물이 유지되고, maintenance (집에 문제가 있을 때 보수해 주는 것)이 잘되어 있어서 훨씬 마음에 안정감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쩌다 보니 고층 유닛에 살게 되었는데, 확실히 확 트인 뷰에서 지내니 답답함이나 고립감이 덜 한 것 같다.
미국에 처음 와서 4인 하우스 셰어부터 시작해서, 홈리스들이 계단 위에 누워있고, 마약냄새가 나고 밑에 집 향신료 냄세가 올라오며, 옆집 하수구 오물이 우리 집 욕조에 차오르는,, 그런 집을 거쳐, 외풍이 심하고 난방비 폭탄을 안겨주었던 1층집을 지나, 드디어 만난 만족스러운 집을 만난 느낌이다. (학교랑 먼 것만 빼고). 아무튼 요즘 미국 아파트들은 재택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공용공간을 잘 꾸며놓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사는 아파트도 공용공간에 개인 독서실 같은 자리를 만들어놔서, 주민들이 일할 수 있게 꾸며놓은 곳이 있는데, 일에 집중도 잘되고 너무 좋다. 부디 계약기간이 끝났을 때, 월세를 많이 올려서 이사 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 2주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날을 꼽아 보자면, 단연 마이너스 20도 이하로 내려간 날, 도보로 출근했었던 날인 것 같다. 지난주에 미국 몇몇 주에 한파가 기승을 부렸는데, 내가 사는 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화요일 (하필이면 꼭 출근해야 하는 날)에는 마이너스 25도 이하로 떨어졌었는데, 나는 호기롭게 도보로 출근을 했다. 롱패딩에 비니, 목도리와 장갑까지 중무장을 했지만, 한 가지 간과했던 것이 너무 얇은 양말을 신고 슬리퍼형태의 어그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던 것이었다. 밖으로 나가서 한 10분쯤 걷자, 목도리에 성에가 차올랐고, 발이 시렸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발이 아려왔다. 이래서 '동상이 걸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발이 점점 아파와서 죽을 것 같을 때 다행히 사무실 건물에 도착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보니, 집에서 챙겨 온 물통의 뚜껑 부분이 열리지 않았다. 뚜껑안쪽의 물이 얼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빨개진 얼굴을 녹이고, 일을 시작하려는데 사무실에 온 옆옆자리 K가 도착해, 그녀에게 물통이 얼어버린 이야기를 했다. (나 혼자 알고 있기엔 너무 신기한 사건이었기에)
그녀는 내가 이 날씨에 걸어왔다는 것에 놀라워했고, 집에 갈 때는 본인이 라이드를 해주겠다고 했다. (이처럼 다정하고 친절한 미국인이 있다니..!) 아무튼 그렇게 집에 갈 때는 그녀의 따끈한 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집에 왔고, 그 어느 날 보다 그녀의 따뜻한 친절이 크게 마음으로 느껴지던 날이었다. 그녀가 없었으면 그 추운 날씨 속에서 또 고통스러운 40분을 보냈어야 했기에..
그렇게 집에 들어와, 이번 미국생활은 나에게 얼마나 감사한 게 많은지 복기하게 되었고, 특히 라이드를 받은 그날에는 K양 같은 사무실 동료를 만난 게 정말 행운처럼 느껴지던 날이었다. 박사시절에는 그냥 캐주얼하게 인사하는 미국인도 한 명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이런 변화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살이 아리게 추웠던 날, 누군가의 친절과 호의로 인해 마음이 뜨끈해질 수도 있다는 몸소 체험을 했던 날이었다.
나도 포닥시절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 방울의 온수가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