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해도 괜찮아
나의 박사 기간 중 나의 상태를 제일 잘 묘사하는 단어는 슬프지만 "무기력함" 아니면, "썩은 뇌(rotten brain)"일 것 같다.
박사 첫 한 학기 이후에 갑자기 코로나가 터져서 모든 것이 virtual로 전환되었고, 나는 4인 기숙사(?) 좁은 방 안에서 수업을 듣고, 박사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 점점 무기력증 (혹은 약간의 우울증?)에 빠졌던 것 같다. 이후 상황이 점점 나아져서 집을 넓혀가고, 주변환경에도 익숙해지면서 산책도 해가며 간간히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억들은 집에서 혼자 모니터 앞에 앉아서, 유튜브를 틀어놓고 꾸역꾸역 일을 하던 경험 아니면, 누워서 무기력하게 유튜브를 보던(binge watching) 기억뿐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런 상태에 도달하게 된 몇 가지 꼽아볼 수 있는데,
1. 생각만큼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아 (지도교수님이 활발하게 연구지도를 해주시지 않아), 할 게 없다고 느껴졌고, 뭐를 배우거나 성장한다는 느낌이 없었다.
2. 차가 없어서 동선에 제약이 많았고, 내가 가는 주가 일 년의 반은 매서운 겨울이기 때문에 실내에 갇혀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3. 박사 때 만난 인간관계들 대부분은 나를 갉아먹거나, 나에게 의존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가 그리 많지 않아서 힘이 되는 인간적 상호작용이 적었다.
4. 그 외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 쪼들리는 경제 상황,, 안 바쁜 것 같은데 그래도 쉴 수는 없는 내적 부담감 등등..
아무튼 이렇게 거의 혼자 고행하듯이 박사생활을 보내던 나에게, 그래도 박사생활의 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졸업연구 차 우간다에서 생활하며 연구를 하러 갔던 5개월 정도의 기간이다.
우간다에서 지내면서, 새로 만난 한국인과 우간다인 친구들을 통해, 박사기간 내에 나를 괴롭혔던 여러 생각들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데, 그중 한 기억을 공유해 보자면,
우간다에서 너무 심심하게 지내던 차에, 여차저차 한국인들 봉사단 모임을 알게 되었고, I성향이 강한 나는 어쩌다가 용기를 내어서, 그 모임에 끼고 싶다고 말을 했다. (심심함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렇게 알게 된 한국인 봉사단 동생 중, 교회를 같이 다니게 되면서 정기적으로 만난 사이가 있었는데, 그 동생이랑 당시 MBTI를 좋아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교회를 끝나고 매주 점심 먹으러 여기저기 식당을 가보며, MBTI얘기도 많이 나누고 서로의 고민에 대해서도 말하며 지냈다. 신기하게도 외지에서 잘 모르는 사이로 만난 인간관계가 더 속얘기를 하기 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 동생한테 내가 꺼낸 고민은, "사람들이 나를 예민한 사람을 보는 것 같아."였다. 박사기간 전까지 나는 스스로를 "뒤끝 없고, 마음이 넓은, 세세한 것에 예민하게 굴지 않는" 사람으로 인지하며 살아왔는데, 이상하게 박사기간 동안 알게 된 (대부분은 교회에서 만난 인연) 사람들이 나를 예민한 사람으로 칭해서 놀라기도 했고, 스스로 그런 나에 대해 수치심을 느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사람인가? 내가 지금 상황이 불안하고 나 스스로가 맘에 안 들어서 괜한 것에 예민하게 구나?"라는 생각으로 나 스스로가 괴로웠다.
그런데 그 동생이 꺼낸 말은, "언니가 예민하니까 공부도 잘하고, 연구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언니한테는 예민함이 강점일 거예요."이었다. 이 말이, 마치 자일리톨을 입에 머금은 듯,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확실히 나는 예민(?) 하기 때문에 학창 시절에도 꼼꼼히 공부했고, 그게 내가 공부를 계속하며 연구자의 길을 걸을 때 나에게 큰 힘이 된 나의 특성이기도 했다. 그 동생의 말 덕에 "아, 예민해도 괜찮구나, 나의 예민함이 내가 공부하고 일을 하는데 필요한 특성이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니 마음이 편해졌다.
박사 때 만난 사람들 중에서, 나를 괜히 예민하게 구는 사람같이 취급하며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내 예민한 기질에 대해 움츠러들었는데, 내 예민함을 소중한 나만의 특성으로 여길 수 있게 생각이 전환된 계기가 되었다. 다시 한번 이 우간다에서의 동생과의 만남에, 그리고 동생의 소중한 조언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예민해도 괜찮아~ 너의 예민함도 소중해" 나 스스로에게 한번 더 토닥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