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오면 우리는 현관 앞으로 달려가. 아이들은 아빠에게 오늘 해야 할 놀이를 예고하지. 나는 왔어?라는 말을 시작으로 당신의 오늘을 대수롭지 않게 물었을 거야.
-점심 뭐 먹었어? 일이 많았어? 좀 늦었네. 가서 씻어. 애들이 당신 오면 게임한다고 공부도 미리 끝냈더라. 피곤해도 시간 좀 보내면 좋겠어. 오늘은 날씨가 습한 게 더 쳐지는 것 같아. 우리는 저녁으로 미역국 끓여 먹었어. 근데 맛있다고 둘 다 잘 먹더라. 아, 그리고 아들은 다음 주에 체험학습 간대. 스쿨뱅킹 빠져나갔지? 한번 확인해 봐. 딸내미는 오늘 학원 끝나고 집에 오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어. 자꾸 넘어지네, 에구. 부대에서 밥 먹는 건 괜찮아? 바쁜 일 좀 마무리되면 말해. 집들이도 한번 해야 하지 않겠어? 뭐, 이것저것 시켜야지, 요즘에는 다들 그렇게 하더라. 피곤해도 조금만 놀아 줘. 애들이 당신 많이 기다렸어. 아빠 언제 오냐고.-
기다렸어. 그래 어쩌면 내가 더 기다렸는지도.
현관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나의 말에, 가방을 내려놓고 씻으러 들어가는 당신을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면서, 화장실 문 앞에 앉아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내가 사실은 더 말이야.
끊임없는 혼잣말에 당신은 좋아도 내심 표정은 그대로인 채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 그래 우리의 모습은 그랬을 거야.
그래, 그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분명 이따 보자고 했는데.
문득 떠오른 남편의 부재가 머릿속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날이다. 끝없이 뻗어가는 상상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수를 들이켰다.
이제는 아무리 봐도 아저씨, 아줌마가 된 남편과 나. 어느새 부모님의 간병인 보험을 고민하고 앞으로 있을 경조사를 위해 밝은 옷보다 어두운 옷을 많이 준비하는 나이가 됐다. 벌써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 서운해 뒤를 돌아보니 시간은 덤덤하게 흐를 뿐이었고, 흐름에 맞춰 바뀌어야 하는 건 오로지 나였다.
그리고 이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때가 조금은 가까워짐을 느꼈다.
며칠 전에는 요즘 들어 고장이 잦은 남편의 차가 걱정됐다. 소나기가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날씨 또한 걱정에 무게를 더했다. “운전 조심해, 요즘에는 내가 잘해도 다른 차가 치고 들어오니까. 항상 천천히 가, 알겠지?” 이 말에 마치 내가 당신의 할머니 같다며, 걱정을 사서 한다고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하던 남편이었다. 그 말에 괜히 또 서운해 토라진 나였다.
양말을 꼭 뒤집어서 벗어 놓는 부자는 잠들기 전에 늘 소파에 나란히 앉아 휴대전화 속 게임 삼매경에 빠진다. 양말 좀 제발 이렇게 벗어 놓지 말라고 한 소리 하면 게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시큰둥하게 알겠다고 대답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붕어빵이다. 그러면 든든한 나의 편 딸이 인형 놀이를 하다 말고 “남자들, 그러지 말랬지? 똑바로 좀 해!”라며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일침을 가한다. 그러면 그제야 “네! 공주님, 그렇게 할게요!”라며 배시시 웃던 남편이다.
그 저녁의 풍경이 참 좋다. 그 모습 떠올리니 오래 살고 싶어졌다.
횡재수보다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걸 매일 체감하기란 어렵다. 반복이 주는 당연함에 쉽게 무뎌지고 금방 무심해지기 마련이라서였다. 하지만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도꼭지의 물을 알아채기 어려운 것처럼 하루는 지금도 속절없이 흐른다. 그리고 결국 세면대는 가득 채워질 것이고 우리의 시간도 어김없이 다할 것이다.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난 할아버지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할머니처럼 나도 그렇게 살게 될까, 아니면 내가 먼저 가고 남편은 혼자가 되어도 밥 잘해 먹고 빨래도 잘하며 지낼까. 어쩌면 손잡고 함께 가는 일이 복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다른 건 다 몰라도 가는 날까지 아프지만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