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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한 건 어쩔 수 없을지라도

by 김초아

내가 사는 동네에 자리한 아담한 근린공원은 아이들의 학교 바로 뒤편에 자리해 있는데, 근처 마땅한 공원이 없는 이곳에서는 없어선 안 될 유일한 휴식처이자 모임의 장소이다. 흰머리가 듬성듬성한 아주머니들은 벤치에 앉아 손주들 자랑에 여념이 없고 중년의 부부는 이번에 새로 생긴 맨발길을 걸으며 앞뒤로 손뼉을 친다. 그보다 연륜이 있는 어르신들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동산 둘레길을 오르고 내려오며 운동에 한창인 모습이다. 아이들의 아침 등굣길과 하굣길에는 노란 조끼를 입은 귀여운 어르신들이 집게를 든 손으로 쓰레기 줍는 봉사를 하시면서 공원의 청결을 유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첫째의 하교를 기다리며, 나는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걸 좋아한다. 아들이 몇 년째 공무원 시험에 준비 중이라며 한탄하는 아주머니와 그 옆에서 “아휴,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다행이네. 우리 딸은 시집도 안 가고, 나이만 먹고 있으니!”라며 자조 섞인 위로를 건네는 아주머니의 대화는 애잔하면서도 정겹다. 하얀 털의 강아지를 데리고 운동하던 할아버지는 강아지가 막무가내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걸 하는 수 없다는 듯 따라 걷는다. 늦둥이가 제일 무서운 법인 건 모두에게 인듯하다.


며칠 전에는 노란 조끼를 입고 자원봉사를 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벤치에 앉아 대화하고 있었다. 나는 끝날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딸이 이번에 출산했다면서.”

“아기는 잘 나왔지. 아휴, 그런데 말도 마. 딸아이가 며칠 입원해야 해서 나랑 아내가 매일 병실로 얼굴을 보러 갔는데. 아니, 당연히 내 딸이 아기를 낳았는데 우리가 좀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근데 한 번은 갑자기 사위 녀석이 병실로 들어와서 한다는 말이 이제 가라는 거야. 자꾸 이러면 장모님 딸 평생 못 볼 줄 알라면서 큰소리를 내는데. 참, 어처구니가 없더라고. 아무리 시집을 갔어도 그렇지. 안 그러나? 이제는, 이젠 내가 내 딸 보는 것도 편치 않게 됐어.”

말이 맺어질 무렵 아이가 책가방을 메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못다 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서운한 마음을 안은 채 아이와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종종 딸에게 하는 말이 있다.

“너는 꼭 외국 나가서 살아. 결혼도 외국인이랑 하고, 아니어도 남편하고 해외 나가서 많이 구경하고 경험하면서 즐겁게 살아. 알겠지?”

아직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딸에게 많이 이른 건 아닌가 싶어 말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그런데 이런 나의 말에 아이는 절대 결혼하지 않고 평생 엄마랑 아빠랑 오빠랑 산다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아휴, 결혼은 해야지. 때 되면 하는 거야. 그리고 명절에도 오지 말고 너희들끼리 재미있게 여행 다니고 그러고 지내. 알겠지?”


그 말을 하면서 문득.

그래도, 지금 말은 그렇게 해도.


어쩌면 아이가 성장해 결혼할 즈음이 되면 나도 공원의 할아버지처럼 딸이 자주 보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섭섭함이 남 일이 아니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지금 종알종알 떠드는 아이는 금방 자라서 어여쁜 웨딩드레스를 입을 것이고, 또 다른 세상으로 걸어갈 날이 올 텐데. 그때가 되면 기쁠까, 슬플까. 아쉬울까, 더 함께하고 싶을까.

다만 못 해준 것만 잔뜩 생각이 나서 미안하고 후회할 것은 분명했다.

“그래, 그때 가서 덜 후회하려면 지금 품 안에 있을 때 잘해주는 것밖에 더 있겠어! 으이구. 별걱정을 다 해, 정말.”

나의 혼잣말에 아이는 더욱 동그래진 눈으로 날 보며 웃었다.

그래. 지금 우리의 시간을 깊이 보내자. 천천히 곱씹고 손잡은 채 느리게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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