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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by 김초아

가을은 겹다. 사람을 괜스레 감성적으로 만들어놓고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한다. 되알진 가을이다. 얄미운 가을이다.

이 시기엔 곧 다가올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모으고 곰은 겨울잠에 들어서기 전 충분한 양의 연어를 먹어야 하는 계절이다. 그리고 그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테다.


길가에 옷차림이 남루한 노인이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힘이 없어 보이는 두 다리는 어설프게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짙은 남색 잠바에 얇게 해진 바지를 입고서. 회색빛 흰머리가 다문다문 자리했고 까무잡잡한 피부는 이마의 주름과 광대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며칠은 씻지 못한 얼굴. 매서운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빠서였을까, 조금 더 안쓰러움을 드러내고자 일부러 씻지 않은 것일까. 알 순 없지만 좀 더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잘 들어맞는 차림이었다.

그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낡고 커다란 종이 상자를 엉성하게 찢어 만든 팻말, 그 속에 삐뚤빼뚤 어리숙하게 눌러 담은 글씨는 간절했다.


‘간질 환자가 있습니다.’


그의 발치에 놓인 깡통 캔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자 안간힘을 내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 안에 돈이 가득 찬다면 그와 그의 가족은 겨울을 잘 보낼 수 있을까. 그 안에 현금이 수북하다면 따듯한 겨울을 날 수 있을까. 어쩌면 든든한 저녁밥을 매일 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라면 말고 따뜻한 흰쌀밥 한 공기 가득 담아서 그렇게 말이야.

하지만 캔의 여백을 보니 줄어든 사람들의 여유만큼 통을 가득 채우기엔 역부족이라 짐작됐다. 그 안에 들어있는 돈은 나의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그나마 외면하지 못하고 가던 발걸음을 멈춘 사람들의 마음이 그가 허전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모여있었다.

그리고 결심한 내 손은 가방을 열었다. 동정심 때문인지, 쉽게 울컥하는 성격 탓인지, 늘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허영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모습은 늘 내 발목을 붙잡는다. 잘은 모르겠지만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에 연민이라는 단순한 이름을 붙였다. 연민의 마음으로 지갑을 꺼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나의 손을 붙잡았다.

“안 돼.”


나를 힐끔 바라보는 노인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제발 도와달라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일이 이렇게 되어 아깝다는 말이었을까.


남편의 손에 이끌려 그 눈길에서 벗어났다. 속이 울렁거렸다. 노인과 멀찍이 떨어진 길에서 남편에게 물었다.

“왜 안 되는데, 안타깝잖아.”

“생각해 봐. 저 사람보다 더 몸이 아프고 힘든 사람들도 다 일하고 열심히 살아. 근데 저 사람은 본인이 노력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도움만을 바라고 있잖아.”

“무언가 일을 하지 못할 사정이 있겠지.”

“그래도 저건 아니야. 저게 세상에서 제일 잘못된 생각이야. 그리고 지금 한 푼, 두 푼 도와주는 게 저 사람을 위한 일인 것 같지? 절대 그렇지 않아. 저 사람 그러면 앞으로 계속 더 일 못해.”



세상에 선과 악의 경계가 반듯하게 구분되어 존재한다면-

대부분이 생각하는 선은 하얀 날개를 달고 깨끗한 옷을 입은 채 한없는 사랑을 나눠줄 것 같은 표정의 천사일 테고, 악이라면 끝이 날 선 새카만 날개에 그보다 더 날카로운 삼지창을 들고 비열하게 웃고 있는 악마의 모습일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실에선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의도와 다르게 때론 선이 악을 만들어 내고,

당장에 악은 결국 선의 길로 가도록 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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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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