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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잡는 날

by 김초아

“영호 온다고? 그려. 그러면 돼지 한 마리 잡아야것네.”

아버지의 수화기 너머로 들뜬 마음을 애써 누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들을 수 없는 그 목소리, 그리운 목소리가 말이다.



사 남매 중 둘째인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멀리 떨어져 살았던 터라 자주 집에 갈 수 없었다. 일 년에 두 번이면 많이 간 정도였다. 더군다나 아직은 어렸던 나와 동생을 데리고 차로 여섯 시간 가까이 되는 거리를 가자니 두 시간만 지나면 언제 도착하냐며 징징대는 우리를 상상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이면 아버지가 참이슬 두 박스와 홍삼을 살 때가 있었는데 나와 동생은 그걸 보고 대번에 알아챘다.

“우리 이번에 시골 가? 와! 신나!”

그렇게 아버지는 그날 저녁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버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는 늘 형제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자식들과 며느리에 사위, 손주들까지 모이면 스무 명 남짓 되는 할아버지의 가족. 새벽부터 출발한 우리가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항상 집 앞 길가까지 나와 계셨다. 과연 언제부터 서 계셨던 걸까.

함께 사는 큰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짐을 풀고 있으면 근처에 살고 있는 큰고모와 두 시간 거리에 사는 막내 고모네 식구까지 차례차례 도착했다. 조용했던 집은 복작복작 활기가 넘쳐났다. 할머니와 큰엄마는 분주하게 주방을 드나들었다.


아이들은 마당과 창고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소와 닭과 염소와 토끼가 있는 할아버지의 집은 나에게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이터만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과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놀기도 하고 염소와 토끼 밥을 주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그만한 재미가 있을까 싶다. 그렇게 놀고 있으면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트럭 소리가 났는데, 덜덜거리는 트럭이 멈추는 소리에 사촌들과 함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바로 온 식구들 배불리 먹이기 위해 할아버지가 준비한 돼지 한 마리가 도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파란 용달차에 실려 온 투실투실한 돼지를 언제 또 보겠냐며 우리는 신기하고 궁금한 마음에 대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구경을 했다.

“아이고, 니들은 보지 말어. 징그러워.”

큰엄마의 만류에 알겠다고 대답하며 몇 걸음 뒤로 걷다 다시 살금살금 대문에 철썩 붙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돼지 울음소리가 하늘을 찌르듯 울려 퍼졌다.

이어 할머니는 커다란 양푼을 들고 돼지 곁에서 무언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걸 조심스럽게 들고 우리가 옹기종기 붙어있는 대문 쪽으로 걸어 오셨다.

“으악! 할머니 이게 뭐예요?”

뭐기는. 귀한거여.”


설마 그걸로 국을 끓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여 나와서 하나씩 뜯어.”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뜨거운 연기를 맡으며 열심히 구운 고기를 아이들은 아기새처럼 끊임없이 받아먹었고 어른들은 간만에 마주한 얼굴을 보고 잔을 부딪히며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당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잘 구워진 갈빗대를 하나씩 들고 뜯던 가족들.

선짓국의 정체를 알아채고 먹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 귀한 걸 왜 안 먹냐며 낄낄 웃던 큰고모의 얼굴.

늦은 시간까지 뛰어놀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종알거리던 아이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돼지 구경은 다시 할 수 없었다.

밤하늘의 풍경도, 염소와 토끼와 풀을 맛있게 오물거리던 소도 추억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기일이 다가오는 요즘이면

어김없이 행복했던 추억이 조금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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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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