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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도 잘 살아갈 사람

by 김초아

전업주부를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직업이라는 것은 내가 하기 싫은 날에도 해야 하고 가기 싫은 날에도 가야 하는 강제성을 가져야 하며 수입이 있어야지만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일단 첫 번째는 완벽하게 충족한다. 매일 눈 뜨기 힘든 날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의 등교 준비를 돕고 밀린 빨래와 설거지, 청소를 해야만 하니까. 그중 가장 하기 싫은 건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다. 가장 저렴하면서 온 가족들의 입맛에 맞는 저녁 메뉴를 골라 차리는 일이 가장 버겁다. 그 후에도 빨래를 개고 널브러진 장난감을 치우고 잠이 오지 않는다는 아이들을 재우는 일까지. 늘 야근이다. 최소한 아이들이 모두 잠들어야 퇴근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충족할까. 남편이 생활비를 주지만 이걸 정말 내가 번 돈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러니 전업주부는 직업이라 하기에 참 애매할 수밖에 없다.


십 년을 주부로 살면서 알게 모르게 위축되었다고 느끼는 일이 있었다. 평소처럼 걷고 있는데 친한 엄마가 왜 이렇게 구부정하게 어깨를 굽히고 걷냐며 무슨 일 있다고 물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늘 땅바닥을 보며 어깨를 굽히고 걷는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수입이 없는 무직의 상태를 오랫동안 보내니 자신감은 떨어졌고 젊었던 시절과는 다른 피부와 몸매 또한 당당함이 떨어지는 속도에 가속도를 더했다. 점점 사람 만나는 일이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었다. 화장품 사는 일도 어색해졌다.

아이들 잘 키우고 있는데. 뒷바라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거면 됐지.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다들 이렇게 살아, 의미 부여하지 말자, 묻어놓은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면 외면을 선택했다.


답답함은 삶에서뿐만 아니라 글 속에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도 느리고 횡설수설하는 사람일 줄이야. 서른둘이나 됐으면서. 단어 하나 때문에, 고작 글자 하나 때문에 몇 시간을 허비하다니.'

이 단어를 쓸지

저 단어를 쓸지

문장을 ‘다’로 끝낼지, ‘까’로 끝낼지

‘만’을 넣을지 말지

별거 아닌 일에 집착하며 하루를 보냈다. 어쩌면 고민하는 행위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난 무직이니까. 글을 써도 수입이 없는 무직이니까.



아이들이 하루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같이 놀자는 말이다. 물론 엄마를 찾는 그 말이 사랑스럽고 행복한 외침이라는 걸 알지만, 그것에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고갈된 체력 때문에 종종 미안한 마음과 달리 짜증을 냈다.


그날에 나는.

“조금만 쉬었다 놀자. 엄마 이제 앉았어. 지금은 잠깐 혼자 시간 보내고 있어, 동생이랑 놀던지. 그리고 엄마 글도 써야 해.”라고 말했고,

“아, 엄마! 또 글 써? 그건 도대체 언제 끝나는데! 어제도 했잖아. 글 쓰지 마. 어차피 천 원밖에 못 벌면서.”라고 아이는 대답했다.


얼마 전 처음으로 받은 응원 댓글에 그렇게도 기뻐하며 자랑했던 내 모습을 아이도 함께 기뻐했는데.

분명 기억할 텐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래, 철없이 한 말인데, 마음에 담아두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그러나 의지를 무시한 채 눈물은 순식간에 흘렀고 급히 뒤를 돌았다. 아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엄마를 울렸다는 걸 알면 아이도 후회할 테니까. 후회는 세상에서 가장 감당하기 힘든 마음이니까.

그리고 운다는 건 인정하는 것이라서, 그래서.


순식간에 벌어진 이 상황에 양치질하다 말고 놀라서 뛰어나온 남편은 아이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다 큰 녀석이 할 말 못 할 말이 있지 누가 말을 그렇게 하냐고 했고, 그리고, 이런저런 소리를 질렀고, 잘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 울리니까 좋냐는 말로 남편의 호통은 끝났다.

그날 밤은 아이를 재워주고 싶지 않았다. 그날은 그랬다.



“직업과 나를 동일시하지 마세요.”

며칠 뒤 빨래를 널면서 듣던 유튜브 속 강연의 말이 울적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그래. 심란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은 직장을 마음껏 다니지 못할 환경을 만들어준 가족들도 아니었고 그냥 눈 딱 감고 일하라며 부추긴 주변의 워킹맘들도 아니었다. 전업주부라 말할 때 나를 무시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본 은행직원도 아니었다. 글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다는 어느 작가의 조언도 아니었고 학부모 행사에 많은 참여를 바란다며 나를 유독 바라보던 학부모회장의 시선도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받은 투고 반려 메일도 아니었다. 천 원밖에 못 번다며 상처를 준 아이도 분명 아니었다.

그것들이 내 존재의 모든 걸 설명하는 건 아니라고 영상 속 강사는 말했다.

이 말 한마디로 속상함과 고뇌가 전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글을 쓸 때 살짝 홀가분해진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직 현실에 무너지지 않았다고. 꿈이 있다고. 그건 대단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문득 읽히지 않을 수많은 습작을 쓰면서, 그리고 반드시 읽힐 글을 쓰기 위해 홀로 분투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단어 하나 때문에 이러고 앉아 있는 당신의 집요함과 섬세함, 인내심은 분명 당신을 성장시킬 자양분이 되어 줄 것입니다. 당신은 뭘 해도 반드시 잘 살아갈 사람이라는 걸, 자주 떠올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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