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세상
에세이_봄은 따로 오지 않는다 16
"아니, 아빠! 아 진짜 아빠는 나쁜 사람이야!"
"엄마는 신경 쓰지 마. 쾅!"
"여보, 진짜 계속 이럴 거야? 앞으로 노력하겠다며!"
"어머니, 지난달에도 용돈 드렸잖아요. 저도 이제 형편이 어렵다고요."
"애미가 아픈데 병원 한 번 같이 가주는 게 어렵냐. 뭐 그리 바쁘다고! 다른 집 자식들은 병원도 같이 가 줘, 영양제에 건강식품까지 잔뜩 챙겨주더구먼. 헛살았네, 헛살았어."
"당신들 일 처리 이런 식으로 할 거야? 내가 내는 관리비가 얼만데 일을 이딴 식으로 처리해!"
"장사 이런 식으로 해서 되겠어? 손님이 왕인 거 몰라?"
"빵- 빵빵!!!"
우리의 일상은 마냥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는 소음과 눈살이 찌푸려지는 외면하고 싶은 얼굴들. 가끔 나를 향한 눈빛은 날카롭고 서리가 내려앉았으며 뜨겁게 경멸한다. 서로 화를 내고 지지 않으려 눈알이 빠질 듯 얼굴에 힘을 주고 갈기를 세운다. 그런 눈빛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기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이 정말 이기적이기만 한 존재라면 이만큼 진화하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중과 배려가 있었고 이타심이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참는 자에게 복은 없는 세상.
'초보 운전'
갓 운전면허를 딴 이들은 초보 운전 딱지를 붙이면 자신이 실수해도 이해해 주고 양보해 줄 거라 생각한다. 누구나 처음의 시절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싸늘하다. 나의 실수는 뒤차의 경적을 불러일으키며 내 귀에는 알 수 없는 자의 욕이 총알처럼 박힌다. 다만 고급차라면 화를 면할 수 있다.
"붙이면 오히려 무시해."
지난날 남편이 나에게 해준 충고다.
"아들 낳아 봤자 소용 하나 없다. 옛날엔 딸 낳으면 사람대접 못 받았지만 요즘은 딸이 최고다. 네 누나는 그래도 몇 번 해외여행도 같이 가줬는데 너는 엄마 관광버스도 한번 안 태워주고. 에잇..."
TV 속 다정한 연예인 부부와 시댁 사랑을 듬뿍 받는 며느리는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별별 민원이 다 있어요. 나 자신이 이렇게 초라해지기는 처음이에요."
그렇게도 들어가기 힘든 명품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취직했지만 가장 많이 하는 것은 관리비 계산이 아닌 머리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하는 것. 그래도 일해야 한다. 해야만 한다.
아침 등굣길에만도 몇 번이나 듣는 경적 소리. 아이들은 놀라고 피하고 멈칫한다. 차가 먼저인 도로. 찡그린 표정. 직장으로 향하는 성난 얼굴들.
자녀가 늦잠을 자서일지도 모를 잔뜩 화가 난 한 가정의 가장은 자녀의 친구일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오늘도 놀라움을 선사한다.
"아, 엄마가 뭔 상관이야. 됐어! 내가 알아서 한다고."
쾅.
닫힌 문도 엄마 마음도 쾅.
그렇게 아이에게 다가가고 싶은 엄마는 어디서부터 꼬인지 모를 실타래를 풀 방법을 찾지 못해 문을 열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정말 화가 난 것이 맞을까?
진짜로 화가 난 것일까?
사실은 다른 감정이지 않았을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서툴고 익숙하지 않다는 변명과 함께 나의 진짜 감정은 뒤로한 채 일단 화부터 내는 것이,
동물과 다를 게 뭘까.
서운해. 아쉬워. 속상해. 무서워. 두려워. 서툴렀어. 조금만 기다려 줘. 그랬구나. 실망스러워. 실망시켜 미안해. 괜찮아. 조심해 줘. 내가 먼저야. 실수야. 아파. 한 번 더 기회를 줘. 양보해 줄게. 양보해 줘서 고마워. 불편해. 부담스러워. 심술 나. 쓸쓸해. 억울해. 허탈해. 초조해. 짜증 나. 야속해. 외로워. 안아줘. 미워. 울적해. 원망스러워. 답답해. 괴로워. 허전해.
이름 모를 이가 나에게 좋은 하루 보내라며 미소 짓는다.
그 미소가 참 귀하다.
귀한 세상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