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에세이_봄은 따로 오지 않는다 17

by 김초아

만약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다면

어제도 기억하지 못하고 오늘도 기억나지 않고

기억 못 할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태어난 날을 기억하지 못하고

나의 부모님을 기억하지 못하며

나의 학창 시절, 친구들, 가족 여행, 졸업식, 스무 살이 된 날, 첫사랑, 아픈 이별, 첫 직장, 좌절을 겪었을 때, 슬럼프의 나날들, 남편과의 첫 데이트,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예뻤던 그 시절, 결혼식, 첫째를 만난 날, 둘째를 안은 날, 아이들과 그린 추억들, 내가 걸어온 길,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잡고 싶어 끝자락을 잡고 아무리 버텨도 잡히지 않을 기억들을 흐르는 물처럼, 해변의 모래알처럼 그저 보내주어야만 한다면.


무얼 해야 할까.


우선 기록해야겠다.

아이들과의 사소한 대화, 남편과의 다툼, 함께 먹었던 저녁, 나의 말을 듣지 않다 넘어져서 다친 둘째, 게임 더 하겠다고 떼를 심하게 쓴 첫째의 표정, 배탈이 나 속이 불편했던 일, 날씨가 선선해 저녁을 먹고 산책 한 일, 잠자리를 잡은 것, 아이가 스물세 번째 만에 구름사다리를 성공한 것, 사진엔 담을 수 없는 나의 시선에서 느낀 감정들까지 모두. 사진으로, 영상으로, 일기로, 메모로 남기자.

나를 둘러싼 모든 이에게 사랑한다고도 남겨놔야겠다.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도록, 언제나 사랑한다고.


두 번째로 화내지 말아야겠다.

주변에도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말이다. 병이 심해지면 내 마음대로 조절이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함께할 날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기에 그 시간을 감사하며 아껴주고 토닥여주는 것에만 써야겠다.


세 번째로 정리해야겠다.

어차피 기억이 희미해져 더 이상 쓰지 못할 테니 정말 필요한 물건만 두고 사놓고 잘 쓰지 않는 것, 상태가 좋은 것은 필요한 곳에 나눠야겠다. 그리고 아이들 앞으로 받은 금전적인 선물들도 싸우지 않도록 정리하고 나와 관련된 문서들도 미리 정리해야겠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성인이 되었을 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 너희들의 결혼식에, 첫 손주가 태어났을 때 하고 싶었던 말을 적어두어도 좋겠다.


네 번째로 웃어야겠다.

내가 울면 가족들도 힘들 테니 씩씩하게 웃어 보여야겠다. 평소와 같이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자주 손잡고 간질간질도 하고 뽀뽀도 많이 해주어야지. 나는 앞으로 더 기억을 못 하지만 가족들은 나의 모습을 평생 기억할 테니 말이다. 마지막까지 늘 그래온 것처럼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


다섯 번째로 모든 것을 그대로 살아야겠다.

내가 아프다고 다 접고 여행을 떠난다거나 땅을 사서 산속에 들어가 산다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로 인해 가족들이 희생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일상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 마지막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일들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실컷 해보자. 분홍 머리로 염색을 해보면 좋겠다.


여섯 번째로 나의 자서전을 만들자.

나는 아버지 누구, 어머니 누구 밑에서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태어났는지, 살면서 기쁘고 행복했던 일들은 무엇이었는지, 특별한 사건들과 기억해야 하는 일들과 같은 나의 역사를 기록해서 내가 누구인지 잊혀가는 순간에 볼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놔야겠다. 그리고 아이들이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할 때마다 언제든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일곱 번째로 사과해야겠다.

살면서 의도하지 않게, 아니면 나의 욕심으로 인해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그때는 어리숙한 나라 그런 결정밖에 하지 못했다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겠다. 그 사람들 기억 속에 자리한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여덟 번째로 조용히 떠날 것이다.

요란하게 펑펑 눈물을 쏟으며 인정하기 싫다고 더 살고 싶다고 애원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걸 안다.

누구나 왔으면 가는 법이다. 함께 할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남편과 아이들 곁에 오래 있어주지 못한 것, 남편에게만 아이들을 남기고 떠나 홀로 힘들게 한 것이 너무나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있던 병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 차분하고 담담하게 떠날 것이다.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 햇살이 적당히 따뜻하게 내리쬐고 유독 창문 밖의 새소리에 귀 기울여지는 날, 따뜻한 바다 내음이 나는 바람이 부는 날.

이날이야, 싶은 날.

가벼운 가방 하나 둘러메고 그 안에는 가족들에게 쓴 편지와 간직하고 싶은 사진 몇 장 넣어서 그렇게.

길을 떠나야겠다.




요즘 들어 자꾸 깜빡한다. 날씨가 더워서이겠지만 문득 '나 혹시 어디 잘못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또 무얼 하면 좋을까?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생각이겠지만 진짜로 그렇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보니

아무것도 투덜댈 것이없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하고 가족에겐 함께할 때 잘해주어야 한다는 것,

혹여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일지라도 그것 또한 내 삶에서 이유가 있는 나의 날이라는 것을

그 시간 지나고 나니 일상이 나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었다.


좀 더 화려하거나 멋스러운 단어와 문장으로 꾸미지 않아도

실패해도, 실수해도, 못해도, 못나도

괜찮은 인생.



1722038359614.jpg 여러분은 무엇을 남기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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