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퇴사일기
직장인이라면 언제 들어도 설레는 말이다.
새로운 출발을 암시하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부터 오래된 과거를 청산고 훌쩍 떠나는 내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나 또한 여타 다른 직장인처럼 마음속에 사직서를 품고 살았다.
품고 사는 것뿐 아니라 때로는 전자 결제를 올리기도 하고, 면담 때마다 사직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내가 한 번씩 토해낼 때면 부서장들은 나에게 떠날 테면 떠나봐라, 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부서장 성과에 반영되는 지표는 오로지 입사 1년 이내 직원의 퇴사율이었다. 그렇다 보니 신규도, 연차가 지긋한 직원이 아닌 나의 퇴사는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걱정 어린 눈으로 이직할 곳은 정했냐는 질문은 '너는 이미 늦었어'라는 칼날처럼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하루가 멀게 면담실 문을 두드리는 신규 간호사처럼 나의 퇴사 의지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으면 바랬다. 단지 그뿐인데도 나의 바람은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한 존재였다.
‘여태껏 잘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니. 지금 네 연차가 얼만데 너까지 신규처럼 굴면 힘들어.’
한숨 섞인 말을 들을 때마다 괜스레 죄책감이 들어 입도 뻥끗 못하고 면담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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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직장에 발 담근 세월이 오래될수록 새로운 갈망과 막연함 사이에서 현재에 남아 있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예전에 퇴사한 동기들에게 물었던 선배들의 모습 그대로 퇴사하는 몇몇 후배들에게 '앞으로 뭐하려고?'라고 묻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 말에는 나도 너처럼 떠나고 싶은데 하고 싶은 게 없어, 라는 자조적인 부러움을 내포했다.
40대, 50대가 되어서도 3교대를 하면서 평간호사로 일하는 선배들의 미래가 곧 나의 미래가 될 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교대근무를 하면서도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삶을 보내는 그들의 모습이 내게는 불가능한 미래로 느껴졌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데 누구를 만나서 결혼할 수 있을까. 아니, 이 일에 끝이 있기는 있는 걸까.
때로 이러한 고충을 선배들에게 털어놓을 때면 한결같은 대답을 듣곤 했다. 난 지금도 충분해.
현재에 불만족해서일까. 한 번 의심을 품기 시작해서일까. 그들의 자족한 삶을 들을 때면 남은 가족들의 수많은 희생이 생생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간호사는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는 직업이었다.
가장이 되기에는 적은 월급과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없는 수많은 시간. 낮은 사회적 인식들. 내가 없는 삶. 그래도 가정을 이루면 이 모든 단점을 상쇄할 만큼 행복할까. 하지만 나에게 많지 않지만 적지도 않은 시간이 남아 있었고, 더이상 병원에 남다가 탈(脫)임상에 대한 의지마저 꺾일 것 같은 시기가 찾아 왔다. 자그마치 6년 8개월 만이었다.
그냥 그만둘까? 내면의 목소리가 속삭다. 간호사가 임상을 벗어나기 가장 최적화된 3년이 지났을 때도 느껴본 적 없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새로운 직장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선뜻 병원을 박차고 떠날 수 없었다. 공무원, 회사원, 부서 이동 등 도전하지 않은 선택지가 없었지만, 합격을 한 발 남겨둔 채 불합격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이직에 대한 의지가 점차 사그라들면서 현실에 안주하게 되었다. 지옥 같은 하루를 버티다 보면 어느 순간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고, 이번 달 월급이 많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한 달이 지나고 있었으니까. 통장에 찍힌 숫자가 커질수록 나의 삶은 무너져갔지만, 그만큼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지표가 따로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찬란한 20대가 사라질수록 나이에 비해 많이 버는 직장인에 가까워졌고, 혼자 지내는 명절과 공휴일이 많아질수록 월급이 늘어갔다. 직장에서 인정받을수록 책임져야 할 업무와 따르는 후배가 많아졌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내가 보람을 느꼈던 모든 일이 덧없게 느껴졌다. 몸은 늙어갔지만, 마음은 자라지 않는 난쟁이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삶의 덧없음을 느껴서일까. 모처럼 쉬는 날에도 일상이 지루해졌고, 다시 병원에 출근할 생각에 잠을 못 잘 때가 많았다. 어느 순간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무엇이 행복한지 잊어버린 나를 깨닫자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간호사로서의 행복이 더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퇴사를 마음먹은 순간부터 병원에 미련이 남기 시작했다. 아직 나를 불러주는 곳도 없는데 그만두면 영원히 백수가 되면 어떡하지. 막연함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흔들리면 안 돼. 이곳 말고 내가 일할 곳은 많아. 나는 아직 젊고, 경력도 있어. 정 안 되면 다른 병원에 가면 그만이야.
물론 다시 임상으로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부정적인 미래로 몰아갈 때마다 억지로 추켜세웠다. 그렇지 않으면 몇 년이 지나도 지금의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2022년 12월 31일 병원을 떠났다.
매일 그만두겠다고 투정 부려도 내 곁에는 항상 좋은 사람이 많았다.
데스크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환자 곁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좋은 간호사라고 믿었던 내 진심을 알아줄 때마다 축 처졌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이 내게 좋은 사람이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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