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학년 이야기

아들 하나 키운 이야기

by insaengwriting
아들은 의대로 대학 목표를 정했다.


영어, 수학 B, 수학 C, 물리, 화학, 일본어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목표는 의대로 대학 진로를 잡았다. 11학년이 되어서 생긴 목표가 아니었다.


9학년 때 테니스장에 테니스를 치고 돌아오다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엠블란스를 부르고 다친 사람을 도운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두 손으로 다친 사람 머리에서 나는 피를 지혈하고 있었고 아들도 나를 도와 응급 번호로 전화를 해서 엠블런스를 부르고 거기서 지시하는 대로 나와 함께 응급조치를 하고 있었다. 응급차에 도착하고 환자를 실어갔고 우리는 평소보다 많이 늦게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충격을 받은 듯한 찰리를 보며 그 사람은 괜찮을 거라고, 안전한 손에 맡겨졌으니 이제 그 사람은 괜찮을 거라는 말을 몇 번 되풀이하며 어두워진 밤길 운전에 집중했다. 집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조용했던 찰리가 들려준 말이 있었다. '엄마 피가 무서워서 의사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직업인데 이젠 의사가 되어보고 싶어요. 다친 사람을 돕다 보니 피가 손에 묻은 것도, 다친 사람을 돕는 기분도 너무 좋았아요'였다. 그런 후 아들은 본격적으로 목표를 의대로 잡고 스스로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호주에서 대학 들어가는 방식은 내가 한국에서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의대는 최고에서 최고의 성적을 원한다.


특히 호주에서 의대는 고등학생일 경우에는 일등 급중에서 최고 성적과 인터뷰 실력까지 겸비하는 아이들에게만 들어갈 수 있는 대학 전공이었다. 그래서 일등 급중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높은 평점을 받는 어려운 과목들을 선택, 공부해야 했고, 그 선택 과목들로 수학 C와 물리를 선택하고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호주에서 특이한 점은 성적 A를 1-10등급으로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기에 처음에는 쇼크를 받은 듯 멍해졌었다. A, A+이 아닌 A1, A2,.... A10까지 있다는 말이었고 A10이 A 중에서는 최고 높은 성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1학년 성적도 12학년 성적과 함께 반영이 된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고등학교 11학년부터는 시험도 어려워졌다. 특히 수학 C와 물리 시험은 마지막 한두 문제는 답을 내기 위해 A4용지가 몇 장이 필요할 정도로 긴 답을 써 내려가야 했고 과목별로 많은 어사인먼트와 발표를 했어야 했다. 이 모든 일 년 동안의 시험 성적과 어사이먼트 성적으로 등급이 결정되고 그리고 마지막 대입고사 성적이 함께 합쳐져 대학 진학이 결정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12학년 성적은 더욱 까다로운 검열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주어진 시험과 숙제 그리고 성적의 적정성과 공평성을 다시 한번 검열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학교별 각 과목 대표 선생님들로 검사관이 짜이고 자신의 소속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 12학년 학생들이 받은 모든 과정과 시험문제, 점수, 일 년에 걸친 모든 어사인먼트를 렌덤으로 뽑아 검열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의 점수가 단 한 명이라도 낮춰질 경우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시험문제들이 대체로 쉬웠거나 학생들의 어싸인먼트를 해낸 수준이 낮거나, 상향되어 주어진 성적이 발견될 경우 그 학교 전체 12학년 학생들의 점수가 하향 조정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학교 자체의 상대 평가 점수가 내려가는 모욕적인 결과를 받게 된다. 일 년의 일을 거의 다시 해야 하는 선생님들에게 엄청난 불편을 주기도 하지만 학교 상대평가가 낮아지는 학교 명예에 큰 상처를 주는 결과까지 초례하게 된다. 한국에서 내가 교육받았을 때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철저한 시스템인 것 같았다.


수학에서 가장 어려운 단계 수학 C


그래서 11학년이 시작되면 이제부터는 선생님들과 부모들의 미팅에서는 주로 대학을 염두에 두고 상담을 한다. 11학년이 시작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아들에게 아주 낯선 사건이 발생했다. 선택과목 수학 C는 최고 어려운 수학 과정이라 수학 C를 선택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으니 두 개의 반 정도만 나왔고 두 분의 선생님이 각자의 반에서 가르쳤다. 그중 한 분은 잘 가르치기로 유명해서 학부모들에는 물론 학생들까지도 모두가 그 선생님 반에 들어가길 원하는 워너비 선생님 한분이 계셨고, 다른 한분은 나이 많은 할아버지 선생님이셨다. 아들은 안타깝게 두 번째 할아버지 선생님반으로 정해졌다. 아들은 자신의 멘토들을 통해 워너비 선생님 반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었으나 우리의 결정은 아직 11학년이니 다른 분에게 배워도 문제없을 거라 생각해서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수학 C과목에서 예비 평가 성적 D를 받다.


그렇게 시작하고 첫 번째 텀에서 치르는 예비 시험 결과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한쪽반은 이미 배운 범위에서 시험에 나왔고 아들 반에서는 그 범위는 근처도 가지 못하고 배우지도 못한 체 시험이 치러진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 반에서는 학생들 모두가 FAIL, F가 나왔고 아들만 생전 처음 D라는 점수를 받은 것이었다. 이날 아들이 얼마나 놀랬는지 점심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 아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엄마 내가 D를 받았어요. 수학 C에서 D를 받았어요" 하는 아들의 목소리는 자신도 너무 황당해서 믿을 수 없다는 자조적인 목소리였었다. 나는 처음엔 D를 B로 잘못 듣고 괜찮다고 말하며 달래 주었다. 'B도 잘한 거지 괜찮아'하는 나의 답변에 아들은 다시 한번 "엄마 B가 아니고요 D요 D"라고 정정해 주었다.


나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아들의 놀란 목소리와 반응이 그저 귀엽기만 했다. B도 받아본 적 없는 아이가 생전 처음 받아보는 D에 어지간이 쇼트를 받은 모양이었다. 집으로 픽업해서 오는 동안 사정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다른 반과 자기 반의 비교와 가르치는 선생님의 스타일에 대한 분석이었다. 아들의 수학 C 선생님은 수업을 하다 이야기가 딴 길로, 자주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날 배워야 하는 양에 진도는 절반도 못 미치며 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이야기로 시간이 지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선생님의 이야기가 수업 진행은 차질을 주었고 수업이나 성적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좋은 이야기로 나중에는 도움이 될 것 같아 재미있게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 성적뿐만이 아니라 반 아이들 전체 거의 30명 가까이가 F, 불합격 성적을 받았으니 무슨 조처를 취하려다 우리는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11학년 그것도 어려운 과목을 선택한 아이들의 부모들이라면 어지간이 불만들을 학교 쪽으로, 담당 선생님 쪽으로 할 거라는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을 감독하는 아들


그런 후 임시 성적을 가지고 첫 번째 11학년 선생님과의 미팅을 하게 되었다. 전과목 일등을 달리는 아이를 맡아서 D를 받게 했으니 나를 대하는 선생님의 얼굴에는 이미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셨다. 그전에 아들에게서 그 선생님에게 들어온 많은 컴플레인에 대해 전해 들었기에 나는 안쓰러움이 들었다. 첫 만남에 선생님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고 곧바로 나의 그럴 수도 있다는 무덤덤한 반응에 선생님은 차츰 편해지셨다.


그때 11학년 성적이 이번 성적은 대학 입시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선생님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찰리는 일 년 내내 수학 C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이 수업 중 딴 길로 빠지지 않고 진도가 제대로 나갈 수 있게 보조 선생님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1학년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항상 워너비 선생님 반에서만 수학 C 과목 최우수 성적 수상자가 나왔던 전설을 아들로 인해 학교에서 내려오던 전설적 기록이 깨졌다.



색소폰 7등급을 받아냈고, 운동은 여전히 테니스를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쳤고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하며 운동을 즐기며 체력을 키웠나 갔다. 그리고 11학년 텀 4가 되자 찰리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12학년 전교 학생회장에 출마를 했고 너무 쉽게 학생회장으로 뽑혔다. 여기서도 초등학교 때의 학생회장과 거의 같은 경로로 선택이 되었지만 조금은 더 까다롭게 출마 학생들의 연설이 몇 번 진행되었고 확연히 다른 점은 투표 결과의 순서대로 학생회장 후보자 4명, 남자 둘, 여자 둘로 최종 확정이 되면 이들 4명 중 학생 회장과 부회장을 주는 마지막 결정권은 교장선생님의 단독 권한으로 되어 있었다. 인종차별을 처음으로 나에게 느끼게 해 주었던 교장선생님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부회장도 괜찮지'하며 지나가는 소리로 아들에게 말했을 정도였지만 뜻밖에도 교장 선생님은 쉽게 아들 찰리를 전교 회장으로 뽑았다고 했다.


나는 아들 한 명을 키웠지만 남자아이들에게는 운동은 필수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할 시간을 쪼개서라도 많이 시켜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많아져도 운동을 줄일 필요 없다. 운동을 줄이는 것은 한 끼 밥을 줄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 때에 받는 모든 스트레스를 땀과 함께 흘려버리는 것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악기를 하나 해서 취미 생활이 넓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16살 되는 생일이 지나자마자 아들은 곧바로 운전 필기시험을 쳤고 L면허를 취득했다. 어릴 적부터 운전하는 나를 보며 아들은 운전에 관심이 많았었고 운전할 수 있는 나이를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빨리 운전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운전면허가 허용되는 최소 나이에 바로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단 L자 면허는 여러 가지 제한이 있지만 그중 한 가지는 조수석에 오픈 면허가 있는 사람, 즉 아들 찰리가 운전하는 동안 내가 옆에 계속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혼자 차를 몰고 나갈 수는 없게 되어있었다. 이렇게 나와 처음엔 운전연습을 하며 기록하고, 전문적으로 운전을 가르치는 분에게 한 시간짜리 5번의 교육을 넣었고 전문가의 주행 연습은 시간이 배로 합산을 시켜 주행 기로에 넣을 수가 있었다. 이 5번 전문가 연습 중 맨 마지막 5번째는 P자 주행시험을 치러 갈 때 사용했다. 주행 시험 중 양쪽에 브레이크가 달린 전문가의 차를 이용해 면허 주행 운전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안전하기에 좋았다. 100시간이라는 운전 시간 기록과 주행 거리 기록을 꼼꼼히 채워서 17살 생일이 지나면 이기록들을 들고 주행시험을 치면 P자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 P자 운전면허부터 혼자 운전할 수 있는 면허이다. 찰리가 처음으로 내차를 운전을 하니 나는 운전하던 때보다 몇 배로 신경이 쓰였지만 운전을 배우며 즐거워하는 아들 모습에 겁 많은 엄마인 내가 용기를 더 내야 했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기술을 하나 내가 직접 전수해주는 것이라 용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가르치며 즐거웠고 지금 우리들의 기억 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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