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었다. 북한에서 숙청된 작가 중 한 명인 시인 백석의 이야기를 소설로 빚어 놓았다.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 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사상과 이념이 전부인 시절에는, 정치적 양상에 따라, 하나의 작품이 추앙받기도 하다가 퇴폐예술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김연수는 그렇게 사라져 간 문학과 예술 작품에 대해 백석의 입을 빌려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고 말했다. 또한 그저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논문에서는 "한설야에 의해 숙청 대상이 된 백석은 삼수의 협동조합으로 현지 파견되었다."라고 한 줄로 정리될 백석의 삶을, 작가 김연수는 이 소설에서 몰락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백석의 좌절을 헤아리고 따라가며 풀어놓고 있었다.
백석은 한동안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백O이라 불렸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1988년 해금 조치가 내려지기 이전까지, 온전한 이름으로조차 불릴 수 없는 존재였다. 북한에서 역시 사상성보다는 문학성을 강조하다가, 문학계 주류에 존재하지 못하고 지방으로 현지 파견 당하고 만다.
우리 역사에서는 백석처럼 남에서도, 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인물들이 더러 있다.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해방 이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던 인물이라는 이유로 우리 역사에서 언급되지 못하고, 북에서는 김일성 정권 확립기에 숙청 대상이었던 이유로 북의 역사에서도 언급되지 못하는 이들. 박헌영과 최창익 같은 이들이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박헌영 결혼 앨범을 꺼내 보았다. 국내 연구자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자료이고 인터넷 검색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이지만, 직접 실물을 보고 싶었다.
미군이 기록해 놓은 자료에 의하면 이 앨범의 노획 장소는 '외무성 박헌영의 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진 속에는 1949년 박헌영과 그의 비서였던 윤레나(윤옥)가 야외 결혼식장에서 함께 있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윤레나의 곁에는 박헌영이 첫째 부인 주세죽 사이에서 낳은 딸인 비비안나가 서 있었다. 신랑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신부는 단아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고, 박헌영은 김일성의 축하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1949년, 이때는 한국전쟁 발발 전으로 박헌영과 김일성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때이다. 박헌영과 김일성, 몇 년 뒤, 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일이 전개되리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누군가의 빛나던 한 시절의 흔적이 담겨 있는 이 앨범이 어찌하여 미국의 문서관리청 박스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또 다른 박스를 열었을 때, 1949년 당시 재정상이었던 최창익이 김일성에게 받은 8.15 기념행사 초대장, 아들과 손자에게 받은 편지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아마 최창익의 근무 공간에 있던 기록을 한꺼번에 쓸어 왔던 듯싶었다.
최창익의 아들 최동국은 스베르들롭스크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손자 최원도는 타슈켄트에서 농업을 공부하고 있었다. 아들은 편지에서 아버지에게 자신이 하는 공부와 공화국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식도 있는 역량과 정력을 다하여 학습에 노력한 결과, 이번 학기 말을 다음과 같은 성적으로서 맞이하였습니다.
중간시험 5과목: 민사소송법, 민법, 형사소송법, 형법, 영어
본시험 4과목: 정치법, 재정법, 토지법, 재판소 통계학, 이상을 5점으로 마치고 12일간 동안의 동기방학을 맞이하야 짧은 12일간이나마 미 기간을 이용하여 소련의 선진과학 발전의 현실적 방향을 견학하였으며 이러함으로써 자기 수양에 유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명일부터는 춘기 학기 과목을 강청합니다. 새 과목으로는 유물변증법과 사적유물론, 꼴호즈권, 노동권, 기타 합하여 10개 과목입니다."
최동국은 아버지 최창익에게 자신이 소련에서 어떠한 공부를 하고 있는지, 또 어떤 공부를 할 예정인지를 편지에 풀어놓았다. 5점 만점에서 5점의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최창익의 손자 원도는 아픈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걱정 어린 편지를 썼다.
"하라버지에게
보내주신 편지를 받아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병환(?)에 차도가 계시다 하오니 기쁘고 반갑습니다. 아무쪼록 바른 시일 내에 완쾌하시어 재출하시기를 빕니다.
할아버지의 혜서(편지)는 지난 이십일에 받았습니다. 그 순간의 감격을 나는 무슨 말로 아뢰였으면 좋을지 알 수 없습니다. 눈물에 가까운 기쁨이 가슴에 찼던 것입니다.. 더욱더욱 명심하여 선진과학을 배우는 데 힘쓰려 합니다. 별로 몸에는 탈 없이 지내오니 안심하십시오."
건강 돌보면서 잘 지내라고 주고받았던 편지와는 달리, 최창익과 그의 아들, 손자는 다시 재회하지 못한다. 1956년 8월 종파 사건 당시, 연안파의 대표 인물이었던 최창익은 김일성의 일당독재에 문제를 제기하다가 결국 숙청당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과 손자는 북한에 귀국하지 않고 소련에 계속 머물렀다고만 전해진다.
수상에게 꽃다발을 건네받으며 축하를 받던 박헌영 부부, 법률과 농업을 공부하며 미래를 꿈꾸는 편지를 썼던 최창익의 가족. 자신들의 운명이 어찌 전개될지 알 리 없던 이들의 행복한 한때의 기록들이 애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