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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Feb 12. 2024

비록 동무하고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편지를 씁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열람실에 자료 신청을 하고 30여 분을 기다렸다. 카트에 서류 박스 열여섯 개가 실려 나왔다. 박스 하나를 열었더니, 봉투에 러시아어로 쓰인 편지 꾸러미가 나왔다. 모스크바에서 유학 중인 북한 학생들이 고국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는 1950년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쓰인 것들이었다.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에 있던 것들을 미군이 38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했을 당시 노획하여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듯했다. 소련 유학생들은 두어 장의 편지지에 "낯선 땅에서 잘 공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이렇게 떠나온 나를 이해해 달라", "자식을 잘 키우고 있어 달라" 등의 사연을 빼곡하게 적어 놓았었다.



그중, 겉봉투 수신인 란에 '최승희 무용연구소', '최승희'라고 적힌 편지를 보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무용수였던 최승희에게 편지를 보낸 소련 유학생은 누구였을까.


"저는 안 동무의 사진을 받고 내 사진을 아니 보낼 수가 없습니다. 이 도시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무, 다시 말하면 우리 애국 청년의 한 사람이 공부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라며, 이 사진에 적은 것이지만 기념이나 될까 하여 보내오니 용서하십시오. -1950년 8월 3일 박태봉 -"


박태봉이라는 청년은 소련을 방문한 최승희의 공연을 보았고, 그녀에게 '안 동무'의 사진을 건네받았던 모양이다. 여기서 '안 동무'는 최승희의 딸 안성희를 지칭하는 듯했다.




다음 박스를 열었을 때, 박태봉이 안성희에게 직접 쓴 편지가 따라 나왔다.


"안성희 동무 앞

벌써 두 번째 편지를 쓰오니 용서하시오. 안 동무는 그 후 소련에서 집으로 돌아가신 이후 옥체 건립은 어떠하시온지 몰라서 궁금합니다…. (중략) 안 동무, 손꼽아 기대하던 환영의 날은 벌써 반달을 지났으나 그때의 모든 일은 지금 같이 생각되며, 동무와 여러 동무들의 사진을 보면 지금 우리들 앞에 즉 옆에 있는 것 같은 감이 나서 못 견디겠습니다."


  1950년 7월, 최승희와 안성희 모녀는 모스크바에서 공연했고, 그 자리에서 박태봉은 최승희에게 그녀의 딸 사진을 건네받은 모양이었다. 박태봉은 최승희에 이전에 친분이 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다음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런 건 아니었던 듯싶다.


"안 동무, 나는 비록 동무하고 말 한마디도 하여 보지를 못하였지만, 나는 편지를 씁니다. 만약에 안 동무가 이 편지를 받는데 괴롭다고 하면 서슴지 말고 전면으로 저에게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안 동무, 이 편지가 동무에게 시간적 지장과 정신적 지장을 준다는 것을 저는 알며 미안하지만, 마지막까지 완독하여 주시오."


  정작 박태봉은 안성희와 한마디 말도 섞어보지 못한 사이였다. 그는 안성희를 사모하는 마음이 컸고 자신이 편지를 연달아 보내는 것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안성희에게 자신의 사진을 보내 자신을 기억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 전하고 있다.


"성희 동무, 나는 벌써 여차에 걸쳐 동무에게 편지를 쓸 마음이 더욱 솟아 올라오기 때문에, 불과 며칠을 지나지 않은 때에 쓰게 된 원인은 다름이 아니라, 안성희 동무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전 날 즉 7월 20일 새벽 3시에 동무의 어머님은 나에게 동무의 사진 한 장을 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동무의 사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었으나, 부득이한 사전에 의하여 말을 못 하든지, 동무의 어머니는 나에게 안성희라고 쓴 사진 한 장을 내 앞에 내놓고 가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요. 

  나는 대단히 기쁨의 마음으로서 안성희 동무의 사진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안성희 동무, 나는 비록 안 동무의 어머님을 통하여 안 동무의 사진을 가졌지만, 안 동무가 준 것 같이 대단히 기쁘오. 안성희 동무, 나도 요전 날 사진을 찍었소. 그 사진은 잘 되지 못하였으나, 나는 동무에게 보내어 받아 주기를 바라오."


  소련 유학생 박태봉은 연모하는 마음을 품게 된 안성희에게 자신의 사진을 전달하면서도, 그건 내가 당신을 연모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어머니가 내게 당신의 사진을 주었고, 그렇다면 나도 답례로 내 사진을 보내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었다.


  안성희, 그녀는 당대 최고의 무용수 최승희와 극작가 안막의 딸이었다. 그녀 역시 어머니의 명성을 이어 무용수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오고뇨크> pdf를 뒤적이다가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라는 소련 작가의 작품 하나를 봤었다. 작품 오른쪽에는 'An song hee'라고 쓰여 있었다. '여성이여, 주방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가자!'라는 포스터로도 유명한 그리고리 쉐갈이 안성희를 모델 삼아 초상화를 그렸던 것이다.




  소련 유학생 박태봉은 다시 또 안성희에게 편지를 띄웠을까. 소련에 머무는 동안 <오고뇨크>에 실린 안성희의 그림을 보기는 했을까. 그는 유학을 마치고 북으로 돌아가 안성희를 만나보았을까.


  사진 속의 박태봉은 가지런한 가르마를 하고 양복을 입고 있다. 연모하는 이에게 보낼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니 최선을 다해 단정하고 훤칠한 모습으로 찍고 싶었을 것이다. 한 문장, 한 문장, 조심조심, 마음을 전하던 수줍은 고백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박태봉의 편지와 사진은 안성희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미국 아카이브 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안성희의 답장을 기다리던 박태봉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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