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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27. 2024

남의 나라 논문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

석사 1학기 시간표를 꽉꽉 채웠다. 학부 수업 2개, 대학원 수업 2개, 총 12학점을 신청했다. 학부 비전공자 출신이라 선수 과목을 이수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기도 했으나, 이왕 등록금 내고 수업 듣는데 많이 들어두자고 생각도 있었다. 3년 후에는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왕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는 오리엔테이션 격의 수업이 끝나고 2주 차가 되면서부터 깨닫게 되었다. 과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주어졌다. 논문 읽고 서평 쓰기, 남의 나라 박사가 쓴 논문 번역하기, 그림 분석해 오기, 주제 조사 발표하기 등이 쏟아졌다. 이번 주에 논문 서평 쓰기를 제출하고 나면, 다음 주에는 대학원 동료들이 써 온 서평문을 분석하고 코멘트 달아주는 과제가 다시 주어졌다. 과제는 끝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뫼비우스의 띠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기도 주저되어 남들이 해온 과제를 보며 눈치껏 따라갔다. 왠지 대학원이라는 공간은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해내야 할 것만 같았다. 모든 과제가 부담스러웠지만, 특히 원서 번역은 내게 가장 큰 난관이었다. 대학생 시절에는 영어 과외 알바도 하면서 수능 영어 씹어먹었다고 자부하였건만, 지금은 이집트 상형문자만큼이나 낯선 언어가 되었다. 놓아도 너무 놓아 버렸다.


<중국 근현대 회화> 수업 때, 앞에 나와 영어나 중국어 논문 화면을 띄워놓고 읽고 해석해야 했다. 그나마 영어는 파파고의 힘을 빌리면 되었다. 간혹 전공 단어를 이상하게 해석해 놓는 경우만 살피면 되었다. 다만 입에 붙지 않는 영어 발음은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파파고 음성 지원을 반복해서 들으며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내 발표 순서 전날에는 음성을 틀고 따라 하기를 50번 정도 반복했다. 긴장해서 숨도 쉬지 않고 읽어가다가 엉뚱한 위치에서 끊어 읽게 될까 봐, 미리 사선(/)을 그어 끊어 읽기 표시를 해 두었다.


영어는 그렇게 넘어간다 치고, 중국어 논문 해석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가 이래 봬도 젊은 친구들보다 경쟁력 있는 분야는 한자였다. 우리 X세대는 유년기에 서예학원에 가서 한자를 쓰며 먹 좀 갈아봤던 세대 아닌가. 하지만 중국어 논문 글씨는 내가 평소에 보던 한자와 달랐다. 간체자와 번체자라는 게 있다고 했다. 전통적인 한자는 번체자라 부르며, 이를 간소화시켜서 간체자를 사용한다고 했다. 이 개념도 이때 처음 알았다. 간체자를 바로 읽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중국어 원서 번역의 또다른 어려움 중 하나는 띄어쓰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어에는 '을/를/이/가'에 해당하는 격조사가 없으니 더더욱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파파고에서 대충 번역을 돌려 낯선 단어를 해석해 놓고 보면, 이상한 문장들이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소련에서 파견되어 중국에 왔던 화가들의 이름을 영어로 표기했으면 좋으련만, 중국화 시킨 단어들로 만들어 놓으니 이 단어들을 미리 알고 구분해내는 것도 중요했다.


원서 번역 발표 전날에는 밤에 조교를 통해 단톡방에 휴강 공지가 올라오지 않을지 내심 기다리곤 했다. 고등학생 시절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즈음이 되면, 철없이 ‘확 전쟁이나 나라’ 싶었던 그 마음이었다. 영어 원서를 발표할 때는 모르는 단어들은 그 위에 한글로 또박또박 소리 나는 발음을 써 두고 그대로 읽었다. 복직하고 학교로 돌아가면 영어 교과서에 한글로 발음 써 놓은 아이들을 비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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