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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29. 2024

대학원에서 주제 발표를 한다는 것

나는 '발표'가 아니라 '강의'를 하고 말았다

  주제 발표 시즌이 돌아왔다. 발표는 대개 연차 순으로 진행되었다. 박사과정생들이 먼저 순서를 정하고 그다음으로 석사 과정생들이 순서를 정했다. 경험 있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발표 방식을 보여주라는 의미였다.

박사과정 선배들의 발표를 보면서 참고할 만한 것을 메모했다. PPT는 그림 도판을 최대 크기로 채워서 배치하는 것, 그 옆에 작품 정보를 덧붙이는 것, 작가 이름이 제일 앞에, 그다음에 작품 제목은 꺾쇠(< >)를 넣어서, 제작 연도와 그림 크기를 차례대로 써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선배들은 두 종류의 글을 써 왔다. 목차와 각주까지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는 배부 용도의 10장짜리 글과 함께 요약 정리한 두세 쪽 자리 글을 함께 가져왔다. PPT 화면을 띄우고 요약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PPT 화면이 넘어가는 대목마다 끊어 읽기 표기를 해 두거나 줄 바꿈을 해서 '읽기'와 '화면 넘김'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애초 다 처음 듣는 이야기이니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거니와, 발표자가 청자와 눈 맞춤을 거의 하지 않고 원고에 얼굴을 박고 있으니 듣는 입장에서는 집중력이 떨어졌다.


  몇 주 후, 내 순서가 돌아왔다. 나는 선배들처럼 별도의 요약 발표용 자료를 만들지 않았다. PPT 화면을 보며 내가 조사해 온 내용을 강의식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교수님과 학우들과 눈을 맞춰가면서 평소 내가 교실에서 수업하듯이 전달력 있게 설명했다. 내가 맡은 주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내용 장악을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발표를 마치고 그제야 강의실 시계를 쳐다보니, 발표자에게 주어진 20분을 훌쩍 넘겨 45분이 지나 있었다. 15년간 중고등학교에서 45분 단위로 수업하던 습관이 그렇게 나타난 거다.


  교수님은 흥미로운 발표였다고 코멘트하셨다. 선배들처럼 지루하지 않게, 전달력 있게 발표했으니 난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나는 내 발표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한 학기가 더 지나고, 다른 과목 발표자들의 발표까지 보게 되면서 내가 대학원 수업 발표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대학원에서의 주제 발표는 논문 심사 발표나 학술대회 발표를 시뮬레이션해 보는 훈련이었다. 이때 모두에게 약속된 시간은 정확히 20분이다. 이 시간 동안 자신이 연구한 것을 집약적이고 압축적으로 다른 연구자들에게 소개해야 한다.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의 주장을 상대에게 부족하지 않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연구자가 갖춰야 할 조건이었다. 선배들이 왜 낭독용 발제문을 별도로 작성해서 저렇게 지루하게 읽어 내려가는 것인지 그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장을 한정된 시간 안에 전달하기 위해서는 밀도 있는 발제문과 발표가 필요했다. 첫 학기 주제 발표에서 나는 '발표'가 아니라, '강의'를 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발표'라는 표현보다는 '학술대회 발표를 보는 것 같은 발표'라는 칭찬이 훨씬 의미 있는 것임을 나중에 알았다.


  발표가 끝나면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진다. 대학원생이 갖춰야 할 역량은 연구 발표 능력뿐 아니라, 다른 이의 연구의 핵심을 파악하고 적절한 질문을 할 줄 아는 능력도 필수적이었다. 연구자의 역량이 드러나는 때는 질의응답 시간일 경우가 많았다. 대학원 수업 중에서 질문은 발표자를 지나치게 당황스럽게 만들면 안 되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해당 수업이 발표자의 지도 교수 수업이라면, 그의 부족한 연구를 날카롭게 지적한다고 던지는 질문이 상대를 자존감의 바닥으로 떨어트릴 우려가 있었다. 서로 눈치를 보느냐고 첫 질문의 물꼬가 터지지 않으면 교수님은 대개 박사과정생들에게 질문을 해 보라고 제안하신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나 같은 석사 1학기 생에는 큰 공부가 된다. 반복되는 질문을 지켜보다 보니 몇 가지 패턴이 있었다. 먼저 해당 주제 발표가 학술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지, 주제 선정은 어떠한 측면에서 참신한지, 새롭게 발견한 자료는 선행 연구와 달리 어떠한 측면에서 유의미한 것인지를 덕담처럼 건넨다.


  본론은 지금부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한 발 나아가자면', '조금 더 보완해 보자면'이라는 문구와 함께 발표의 한계에 대해 지적한다. 논리 전개 과정에서 어떠한 비약이 있었는지, 발표 내용 중에 어떠한 오류가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만 끝나면 발표자는 집으로 돌아가 자괴감의 깊은 수렁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마지막에는 연구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개선책을 제시해 주면 좋다. 어떠한 논거를 추가해 보라든지, 어떤 연구자의 논문을 살펴보라든지 등의 대안을 주고 마무리한다.


  질문자뿐 아니라 발표자 또한 몇 가지 답변 매뉴얼이 있었다. 답변하기 전에 '좋은 질문해 주셔서 감사하다'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이 좋다. 사실 질문은 나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던지는 것이 아니라, 미로로 빠질 법한 발표 글의 방향을 잡아주고 논리의 빈칸을 메워주는 기능을 한다. 감사하다는 인사는 그러한 질문의 의미와 기능을 잘 알고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상대의 질문에 대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범주일 경우 최대한 성실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만약 미리 파악하지 못한 내용을 맞닥트렸거나 오류를 지적당했을 경우, 알려주신 내용을 참고하여 최종 발표 글에는 수정 반영하도록 하겠다고 이야기하면 된다.


  간혹 질문자가 여러 개의 질문을 한꺼번에 던지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질문이 여러 개여서, 제가 놓쳤는데 세 번째 질문이 뭐라고 하셨죠?"라고 묻는 건, 조금 무성의하게 보이기도 한다. 질문이 여러 개 나열될 경우, 발표자는 질문을 경청하면서 번호를 붙여가며 메모를 해 두는 것이 좋다. 이후 답변하기에 앞서 상대의 질문을 다시 한번 요약해서 환기하는 것도 좋다. 그 자리는 발표자와 질문자만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나머지 청자들에게 내가 지금부터 이러한 내용을 차례대로 답하게 되리라는 것을 설명하는 기능을 한다.


  이렇게 써 놓고 나니 자기 계발서에 나올 법한 내용 같다. 약간의 패턴을 이용하면 서로에게 예의를 지킬 수 있다. 하지만, 문득 드는 생각은 이런 내용을 미리 알고 발표했다 한들, 그것이 온전히 내 것이 되었겠는가. 결국 시행착오와 지금의 성찰만이 이렇게 내 몸에 체화되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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