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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31. 2024

세상에서 사라졌던 흔적을 불러오고 배열하고 꿰매는 연구

대학원에서 콜로키움이 열릴 거라고 했다. '콜로키움',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였다. 선배들에게 이것은 대체 무엇이냐 물었다. 심포지엄이나 세미나 비슷한 것이라고 했다. 대개 논문을 어느 정도 완성한 단계에서 동료나 후배 대학원생들 앞에서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받는 거라고 했다. 논문을 쓰려면 언젠가는 거쳐야 하는 단계이니, 참석해서 분위기를 봐 두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 했다.


콜로키움 발표장에는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많았다. 발표자들은 대개 이미 석사나 박사 수료를 마친 후 논문을 쓰고 있는 단계의 선배들이었다. 도서관이나 학과 연구실에서 자신이 설정한 주제와 싸우고 있는 이들이니 대학원 수업 때 마주치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 콜로키움 발표를 들으며 <진상화보>라는 잡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진상화보>는 1912년 중국 상해에서 창간된 미술 관련 종합 간행물이다. 광저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영남화파 화가 고검부, 고기봉, 진수인 등이 일본 유학에서 배워온 선진 미술을 소개하고 있다. 이 잡지는 단순한 미술 잡지에 그치지 않는다. <진상화보>가 표방하는 창간 목적 중 하나가 '공화정치의 감독'이었다. 새로운 중국 건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담아내는 언론지 역할도 했다.


A 선생님은 영남학파의 출판 활동으로 언급만 되던 <진상화보>의 실물을 직접 확보하고, 이를 분석하는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진상화보>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 상해도서관에 연락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소개해 준 <진상화보>의 실제 내용에는 1910년대 당시 중국의 정치 상황과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이처럼 당대 사회상을 미술 작품과 사진으로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중국에서도 연구된 바가 거의 없다고 했다. A 선생님은 발표 말미에 <진상화보>라는 주제는 연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고 덧붙였다.


1910년대 중국 상해에서 발행된 <진상화보>가 자국에서조차 연구되지 못한 이유는 현재의 정치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 잡지는 국민당을 지지하는 기관지 성격을 갖고 있었다. 공산당 정권에 의해 수립된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국민당을 옹호하는 잡지를 소장하고 연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공산당과 국민당이 각각 중국과 대만으로 나뉘면서 서로의 이념과 맞지 않는 자료들은 공유되지 않고 연구되지 않은 것이다.




다음으로 홍성후 선생님은 화가 이석호에 대해 발표했다. 1904년생인 이석호는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으로 유명세를 가진 화가임에도 아직 논문 한 편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한국전쟁기 그만의 사정으로 북으로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은 화가는 유족과 인터뷰를 통해 연구를 채워갈 수 있다. 하지만 유족의 연락처를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홍성후 선생님은 언젠가 딱 한 번 유족이 한 언론사와 인터뷰했던 내용과 마을 입구 사진 한 장에 주목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을 찾아가서 무작정 노인들을 붙잡고 아버지가 화가였다가 북으로 올라간 집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렇게 물어물어 수소문한 끝에 이석호의 아드님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콜로키움 자리에서는 인터뷰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내용과 유족이 보여준 이석호 관련 미공개 사진도 소개해 주었다.


오늘 발표한 선배들은 아직 국내에 한 번도 논문으로 소개되지 않은 미술 잡지와 화가를 조사해서 소개했다. 그 흔적을 찾기 위해 중국 상해도서관에 연락하고, 유족을 만났다. 모두 그 과정이 꽤나 즐거워 보였다. 누군가의 뒤를 밟아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의 글과 그림에 숨결을 불어 넣는 일은 회화사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특히나 이 세상에서 사라졌던 흔적을 불러오고 배열하고 꿰매는 연구는 미술사적으로도, 한 개인의 삶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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