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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30. 2024

“뭐 전공하실 거예요?”라는 질문

  2학기가 되자 학부 강의실에 대학원 신입생 모집 안내문이 붙었다. 대학원 개그 중에 "소년이 죄를 지으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죄를 지으면 대학원에 간다."라는 말이 있던데, '죄를 지을지', '죄를 짓지 말지'를 고민하는 학부생들은 선배나 학과 교수를 찾아가 상담을 통해 자신의 전공을 결정하는 모양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준비 없이 대학원에 온 것인가.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자기소개서 지도나 면접 지도는 많이 해 온 터라, 대학원 자소서 작성이나 면접 준비가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그 막연한 자신감 때문에도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사전 조사와 이해 없이 대학원생이 되었다.


  대학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선배들은 내게 “무슨 전공하실 거예요?”라고 물어왔고, 나는 "저 미술사 할 건데요"라고 답했다. 답변하면서 잠시 속으로 '참 뜬금없는 질문이네'라고 생각했다. 미술사학과에 온 나한테 무슨 전공을 하겠냐고 묻다니. 그런데 그때 내 대답을 들은 선배들의 얼굴에는 황당한 표정이 스쳤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건네왔다. "회화사, 도자사, 불교사 중에 어떤 거 하실 거예요?"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에게 고대사, 중세사, 근세사를 할 것인지, 한국사, 세계사, 동양사를 할 것인지를 물었더니, "저 사학 전공할 건데요. 왜요?"라고 반문한 상황과 같았을 것이다. 아까 선배들의 질문에 대해 "중국 근현대회화사를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라고 연구 대상이 되는 국가+시기+분야를 조합해서 이야기했더라면 선배들이 나를 조금 덜 측은하게 바라봤을 텐데 말이다.


  미술사 대학원은 크게 도자사, 회화사, 불교사(조각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전공으로 나뉜다. 학부 과정에서 전반적인 것을 배우면서 자신의 ‘취향’을 파악한 것을 전제로, 취향을 ‘심화’하기 위해 대학원에 오는 것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스타벅스에 가서 아메리카노, 라떼, 마키아또, 프라푸치노를 다 마셔보는 단계가 학부 과정이라면, 프라푸치노의 세계로 들어가 자바 칩 프라푸치노, 피스타치오 아보카도 초콜릿 프라푸치노, 화이트초콜릿 크림 칩 프라푸치노, 카라멜 프라푸치노의 차이를 줄줄 읊은 후, '그리하여 나의 취향은'이라고 이야기하는 단계가 석박사 과정이었다.


  대학원에 온 지 2학기가 되어가자, 나의 전공과 지도교수를 정해야 했다. 입학 이후 도자사와 회화사 수업을 듣고 있었다. 도자사는 편년을 중심으로 도자기의 변천 과정을 살피는 장르의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스토리텔링 면에서 조건이 좋지 않았다. 유물 관련한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제작자-당대 소장자-후대 소장자(이른바 컬렉터)'의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경우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배지가 가 있던 추사의 상황이 재현된 이미지- 이 작품을 받아온 제자 이상적과 이를 청나라 문인에게 보이고 받아와서 추가된 기록들-일본으로 건너간 세한도를 후지쓰카를 찾아가 받아온 손재형의 에피소드,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이 유물은 특별전에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간다.


  도자사에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회화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부하지 않았다. 당시 그것을 제작한 도공의 흔적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 도자 제작의 환경과도 관련이 있다. 도자기를 예술품으로 인식하고 전문 예술가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부역의 형태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도자사는 제작자와 당시 소장자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보다는 문양에 대한 상상력이 가미된 해석이나 흔히 컬렉터라 불리는 후대 소장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도자사는 나름의 맛이 있다. 땅속이나 무덤, 해양 조사 과정에서 새롭게 유물 자료들이 나타난다. 이런 자료들이 나올 때마다 이론이 조금씩 수정되고 내용은 보완되거나 재구성된다.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맛이 좋은 학문이다. 사료 속에서 관련 구절을 찾게 될 때의 짜릿함이 있다. 땅속에서 파낸 유물의 명문 속에서 그걸 발견하는 현장 연구자들의 짜릿함은 얼마나 더 클 것인가.


  도자사와 회화를 두고 저울질을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공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생각했다. "뭐 전공할 거예요?"라는 질문은 "너를 가슴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라고 묻는 말과 결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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