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ti Jan 29. 2024

조선시대 도공의 마음으로 도자기 100개를 그리다.

도자사 수업을 듣겠다고 했더니, 선배들은 한 학기에 도자기 100개를 그리게 될 거라고 했다. 도자사 전공으로 4학기를 마친 선배는 "저 꼬박 400개 그렸잖아요."라고 했다. 그리고 주의 사항 하나를 덧붙여 알려주었다. 


"절대로 박물관 도록이나 인터넷 사진 보고 스케치하지 마세요. 교수님이 제가 직접 가서 보고 그린 거, 아닌 거 아셔서 들통났어요."


박물관에 가서 직접 유물을 보고 그리면서 실재감을 느껴보라는 교수님의 의도와 달리 받침대 없는 박물관에 서서 유리 건너편 도자기를 보고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100개나 그려야 했다. 


"아니, 교수님은 어떻게 그림만 보고 직접 가서 보고 그린 게 아니라는 걸 아셨데요?"

"각도요. 도록 속의 도자기 사진은 눈높이를 유물 중앙에 맞춰서 정면으로 찍은 거잖아요. 하지만 저희가 박물관에서 도자기를 보는 각도는 다르니까. 내려다보는 각도에서 그려져야 하고요."

"역시!"


수십 년을 제자들이 그려온 도자기 스케치 그림을 봐 온 교수님의 눈에 대학원생들의 이런 꼼수가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선배들은 그들만의 생존 비법을 후배들에게 전수해 주었다. 


"그러니까 만약 사진 보고 그리실 거면, 박물관 가셔서 사진을 직접 내려보는 각도로 찍어와서 사진 보고 그리세요!"


나는 이화여대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호림미술관에 가서 도자기 사진을 찍어왔고, 그 옛날 도자기 만들었던 장인처럼 무념무상으로 도자기를 그렸다. 마치 수능 시험 감독을 하는 느낌이었다. 수능 감독관은 매시간 100분 정도를 교탁 앞에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한다. 극도로 예민한 긴장감이 넘치는 공간에서 수능 감독관의 미덕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교탁 위의 수정테이프마냥 필요할 때만 존재감을 발휘하고 나머지는 눈동자만 굴리는 시간을 보내야 할 때, 지난 시절 내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대학 시절 그놈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지난 세월을 추억도 하고 반성도 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잡생각으로 최선을 다해도 고작 2교시 수리 영역 시간밖에 되지 않음에 다시 또 좌절하곤 한다. 도자기 스케치 과제는 이래저래 열심히 그려도 하루에 10개 이상을 채우기가 쉽지 않았다.


도자기 과제는 스케치에서 끝나지 않았다. 각각의 도자기마다 설명문도 써야 했다. 청자는 기형이 다양해서 백자보다 그리기 어려웠다. 백자는 단출해서 그리기 쉬웠지만 막상 설명을 쓸 때는 늘어놓을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기가 쉬운 도자기는 쓸 설명이 없고, 쓸 이야기가 많은 도자기는 그리기가 어렵고 그랬다. 전문 용어가 남발하여 읽어도 흡수되지 않는 박물관 도록의 설명을 작성해야 했다. '그들만의 용어'로 나열된 유물 안내문은 참 별로인데, 대학원을 마치고 학예직으로 나갈 학생들에게는 꼭 필요한 과정이기는 할 듯싶었다.


도자기 과제는 학부 수업에 30개, 대학원 수업에서는 100개를 내야 했다. 학부 수업 도자사 교수님은 이전 선배들이 제출한 과제 샘플을 보여주셨다. 학생들 서술에는 밑줄과 함께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젊은 교수님은 문화재를 서술하는 방식이나 순서에 대해 세부적인 지적을 해 두었다. 40명이 넘는 대학생들의 과제물을 이렇게 일일이 피드백해 주었더라. 학교에서 아이들의 역사 수행평가 제출물에 점수만 부과하고 도장 찍고 과제를 돌려주었던 내가 잠시 부끄럽기도 했다. 한편 또 내가 이십여 년 전 학부생 시절일 때, 이런 마음을 지닌 사범대 교수를 만났더라면 어땠을지 하는 생각도 스쳤다. 예시본을 보고 나니 어떻게 작성해야 할지 감이 오기도 했고, 이렇게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과제에 조금은 진심이 되었다.


교수님은 도자기를 그리면서 기형, 문양, 기법 등을 다양하게 관찰하여 묘사하라고 하셨다. 설명문은 관찰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이므로 관찰자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쓰라고 했다. 먼저 전체적인 외형에서부터 세부적인 문양으로 단계적으로 접근하라고 했다. 객관적 사실을 기술하는 능력과 함께 감정을 표현하는 노력 또한 잊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다. 대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자꾸 들여다봐야 하니, 몸으로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도자기 그림을 그릴 때마다 추석마다 TV에서 봤던 성룡 영화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악당들에 의해 가족이나 스승을 잃는다. 이에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무술을 단련하기로 결심한다. 그들이 만난 이들은 맨날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초라한 산골 노인에 지나지 않았는데 알고 보면 무림의 고수였다. 하지만 그들은 무술이라고는 가르쳐 주지 않고, 3년 동안 물만 길어오게 하고 장작만 패게 한다. 주인공은 지치고 만다. 무임금 노동착취의 현실을 깨닫고 고수에게 항의하는 주인공은 어느새 기초 체력이 단련되어 고수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자기 그림을 그리며 혹시 나도 그런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인가를 계속 되물었다. 


한 달여 꼬박 도자기 과제에 집중해서 130개의 스케치와 설명문을 제출했다. 조선시대 관청에 공납으로 도자기를 납부해야 했던 도공의 삶을 간접 체험한 기분이었다.





이전 08화 '정소공주가 짧게 산 덕분에'라고 말하지 않는 태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