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시대, 조직에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연휴 기간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정주행한 후 이선균이 뱉은 한마디가 머릿속에 수없이 맴돈다.
극 중 건설회사 부장인 동훈(이선균)은 조직에서 겉도는 파견직 지안(아이유)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지안은 편안함에 이르다라는 이름의 뜻과는 정 반대의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로 인해 사람들과의 관계의 끝은 비극일 뿐이라고 이미 답을 내렸다. 사회생활에서 요구되는 상냥하고, 친절한 직원이 되는 것은 포기한지 오래다.
지안은 직원들이 묻는 질문에 단답형으로 툭툭 답을 내뱉고, 오로지 자기 할 일만을 묵묵하게 한다. 심지어 복사용지가 어딨냐고 물어보는 어느 대리의 질문에 대답을 대신해 서랍을 발로 툭차버린다. 이런 행동들로 인해 직원들에게 버르장머리가 없다며 미운털이 박혀있지만 그녀는 전혀 게의치 않는다. 어차피 세상은 혼자라는 듯이.
후에 그녀는 자신에게 유독 잘해줬던 동훈에게 이렇게 말한다.
"처음이었는데, 네 번 이상 잘해준 사람.."
그녀가 마음속 문을 굳게 닫아버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어렵사리 꺼내보인 자신의 상처와 마주했던 사람들이 보여준 일관된 행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훈은 회식자리에서 이런 지안을 흉보는 팀원들에게 한마디 한다.
"너희들은 걔 안 불쌍하냐?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주잖아. 상처 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래서 불쌍해"
회사에서 MBTI/DISC와 같은 진단 도구를 활용해 팀 빌딩 교육을 여러차례 운영했다. 같은 회사임에도 참여하는 팀들의 분위기는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팀은 강의장에 들어오면서부터 생기가 넘친다. 직책자와 팀원 구분 없이 누구나 허심탄회하게 농담을 나누거나 업무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팀은 강의장에 들어올 때부터 분위기가 숙연하다. 생기가 있고 없는 것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조직도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는 말이 피부로 와닿았다.
실제로 교육이 시작되고, 진단 결과를 기반으로 각자의 치부(보완점)가 제시될 때 전자는 즐거워하며 공감하는 반면 후자는 몹시 불편해했다. 서로의 부족함과 취약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조직에서 그 조직의 구성원들, 더 나아가 조직 전체는 경직되어 간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대추 한 알 - 장석주
경직된 조직은 드라마 속 지안처럼 한순간 얼어붙어 버린 것이 아닐 것이다. 조직내에서 상위 직급자와 하위 직급자가 나누는 대화의 온도, 감정섞인 피드백,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적 지시 등 수없이 많은 경험이 쌓여가며 실무자들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범위를 좁히고, 생각의 폭을 제한하며 서서히 경직되어 왔을 것이다.
한 번의 실수 조차 용인되지 않고, 서로를 비난하는 조직은 새로운 시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고작 10~20% 정도 되는 성공을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구성원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직된 조직과 유연한 조직의 차이는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에서 온다. 직급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건설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있을 때, 각자가 인격체로서 존중받고 서로의 취약함을 드러낼 수 있을 때, 높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함께 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지속될 때 모두가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 MIT Sloan X Deloitte 연구 『Aligning the Organization for Its Digital Future』
MIT Sloan과 Deloitte에서는 디지털 미래를 위해 정렬된(경쟁력 있는) 조직을 연구했다. 그들이 말하는 디지털 시대의 경쟁력이란 예측이 불가능한 경영환경에서 새로운 가치 창출 비즈니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다.
그 어떤 뛰어난 모형도 블랙 스완을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위기의 형태나 크기를 예측하기보다 위기에 강한 체질로 무장하는 것이다.
- 블랙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 -
회사에서 체질이 있다면 무엇일까? 바로 조직문화다. 조직문화는 조직 구성원들의 의사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의 핵심 메시지도 일맥상통한다. Digital Transformation은 기술이 아닌 탁월한 조직문화가 이끈다는 것이다. 즉 문화, 사람, 구조, 업무 등 총체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 조직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한다. 파괴적 혁신이 거듭되며 수없이 많은 유니콘 기업이 탄생하는 시장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전략이나 전술보다 위기에 강한 체질로 무장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연구에서 밝힌 디지털 성숙도가 높은 조직은 산업에 관계없이 6가지 공통된 특성을 지녔다.
1. 민첩성
(느릿한/신중한 ↔ 유연한/재빠른)
2. 리스크 감수도
(조심스러운/위험을 피하는 ↔ 대담한/실험적인)
3. 의사결정
(직관적인 ↔ 데이터에 기반한)
4. 리더십 구조
(위계적인 ↔ 분권화된)
5. 일에 대한 열정
(살기 위해 일하는 ↔ 일하기 위해 살아가는)
6. 업무 방식
(독립적인/벽이 있는 ↔ 협력적인)
재직중인 회사에서는 이 6가지 특성에 에드거 샤인이 말하는 조직문화의 3층위 구조를 대입해 조직문화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6가지 특성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간단한 진단을 개발했으며, 이 결과를 글로벌 상위/중위/하위 그룹과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서 각 특성을 시스템과 제도, 리더십, 구성원의 신념과 가치관 세 가지 측면으로 쪼개 입체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결과를 참고해 조직 전반적인 유연성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개선점과 각자의 역할을 도출한다.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친구 한 명과의 술자리에서 후일담을 들을 때였다. 그 친구는 대뜸 질문했다.
외국 친구들이 가장 멋져 보였을 때가
언제인지 알아?
다양한 답을 내놓던 친구들 앞에서 그 친구가 공개한 정답은 이거였다.
Why not?
친구는 이 말을 들을 때면 어찌나 상대방이 쿨 해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본인은 실패할까 성공할까 앞뒤를 재며 전전긍긍하고 각을 재고 있는데 일단 뭐 실패하면 어때?라고 유연하게 도전하는 이런 마음가짐이 참 부럽더란다.
그렇다. 유연성은 곧 한 사람과 조직의 체질이다. 그들은 경직되기보다는 물러서 실패 앞에서 쉽게 깨지지 않고, 좌절하기보다 또다시 배우고 성장할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사이클로이드 곡선을 생각해보자. 최단 거리는 직선이나 결국 목적지에 빠르게 도달하는 것은 곡선이다. 직장에서 만난 우리 역시 정해진 답을 강요하기보다 서로를 믿고 빛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변화가 극심한 지금, 우리는 직선이 아닌 곡선의 변주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 역시 지안의 어두운 과거를 알고서도 또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며 이렇게 말했다.
"니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니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니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니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이름대로 살아. 좋은 이름 두고 왜.."
참고자료.
1. 『Aligning the Organization for Its Digital Future』_MIT Sloan X Deloitte
2. 『조직문화 통찰(우리 조직의 운영체제는 무엇인가)』_김성준 저